"카레이싱은 국제 스포츠 중 유일하게 남녀 구분이 없는 종목이에요. 그럼에도 여전히 '남초' 사회죠. 제 도전을 통해서 일명 '김여사'로 불리는 여성 운전자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어요."
지난달 23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권봄이(32) 카레이서는 경주의 매력에 대해 이 같이 설명했다. 스포츠카를 타고 트랙을 도는 카레이싱은 라이선스에 따라서만 등급을 나눠 경기할 뿐 남녀가 모두 동일한 조건에서 시간 경쟁을 벌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카레이서 세계는 '남초' 사회다. 대한자동차경주협회(KARA)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서킷 경기에 출전이 가능한 라이선스를 보유한 선수는 총 600명이다. 이 중 여자 선수는 전체의 6%도 채 안 되는 35명 안팎이다.
권 씨는 "카레이싱은 시속 220km로 달리는 속도 압박감과 부상 위험이 높아 여성들이 처음 진입하기가 어려운 스포츠"라며 "그렇기 때문에 더 해보고 싶은 도전 의식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어 "대회뿐 아니라 차와 관련된 강의도 진행하면서 여성 운전자에 대한 편견도 하나씩 깨가는 중"이라고 강조했다.
권 씨는 2017년 CJ슈퍼레이스 GT2 클래스에서 당당히 종합 3위를 차지했다. GT2 클래스는 양산차를 개조한 차로 참가하는 대회 중 두 번째로 등급이 높다. 권 씨는 "GT2 클래스는 제네시스 쿠페로 참가하는 데 차를 다루기가 힘들어 여성 드라이버들 사이에서는 무덤으로 꼽힌다"며 "1등은 아니지만 할 수 있다는 걸 입증한 것 같아 가장 뿌듯한 대회"라고 말했다.
권봄이 카레이서. [사진=신미진 기자]
스피드의 세계로 뛰어든 계기는 우연이었다. 2009년 친구를 따라 방문한 카트장이 계기가 됐다. 속도의 짜릿함에 온 몸이 뻥 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후 2년 동안 온 일을 제쳐두고 매일같이 카트장으로 출근했다. 그러다 장윤식 당시 팀챔피언스 단장을 만나 2011년 투어링카에 입문하게 된다.
권 씨는 "코너를 돌 때 대부분 속력을 줄이는 데 저는 과감하게 코너링한다"며 "이 모습이 선수로서 강점으로 봐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어릴때 쌍둥이 여동생과 달리 미니카를 좋아했다"며 "19살 운전면허도 독학으로 취득할만큼 차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도전을 즐기는 권 씨는 고등학생때부터 경험해본 직업만 10개가 넘는다. 보험회사 텔레마케터부터 사무직 경리, 골프연습장 직원, 피부관리사 등 분야도 다양하다. '아이돌 연습생' 출신이라는 꼬리표도 늘 항상 붙는다. '미녀 레이서'로 유명세를 타며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권 씨는 "행복한 직업을 갖고 싶었는 데 맘에 들지않으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 과감히 그만 뒀다"며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이돌 연습생은 작곡에 뜻이 있어 공부를 하던 중 우연한 계기로 가이드 녹음 작업을 했을 뿐 체계적인 훈련을 받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늘 행복한 순간만 있는 건 아니다. 권 씨는 2014년 '코리아스피드페스티벌(KSF)' 벨로스터 터보 마스터즈 최종전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 다른 차와 충돌하며 자칫 하반신 마비가 올 수 있는 정도였다. 온 몸에 6개 나사를 박는 큰 수술을 이겨낸 권 씨는 1년이 채 안된 2015년 복귀를 하며 주위를 놀라게 했다.
권 씨는 "병원에서도 복귀한 게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며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그는 "다시 레이스만 뛸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며 "수술 방법도 엉덩이 뼈를 목에 덧대고 나사를 박는 방식을 택했다. 더 고통스럽지만 가장 확실한 방식이었다"고 말했다.
훈련은 지옥과 같다. 카레이서들은 찌는 폭염에도 아스팔트 위를 달려야한다. 여기에 딱 달라붙는 수트와 시트에 몸을 고정하기 위한 각종 장비까지 착용하고 나면 사막이 따로 없다. 이 때문에 레이서들은 일부러 한 여름에 찜질방 사우나에서 버티기 훈련을 한다. 겨울에는 스키로 레이싱 때 차량의 무게를 옮기는 방법도 익힌다. 근육을 키우기 위한 헬스는 필수다.
권 씨는 "최근 인스타그램으로 카레이서가 되기 위한 조언을 구해오는 분들이 많다"며 "어쩔땐 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만큼 힘든 순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네발 자전거에서 두발 자전거가 되듯 차 종류를 점차 업그레이드해 갈 때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카레이싱의 매력을 짚었다.
현재 권 씨는 드라이버 인스트럭터(Instructor)로 활동 중이다. 대회에 나갈 팀을 꾸릴때까지는 이 일에 전념할 계획이다. 가장 큰 대회에 나가 1등을 해도 선수 개인이 받는 상금은 약 800만원에 그친다. 대회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국내에서는 현대자동차와 벤츠 등이 드라이빙 스쿨을 운영 중이다.
권 씨는 "성취감을 위해 레이싱을 한다면, 드라이버 인스트럭터는 자부심을 위한 직업"이라며 "시동도 걸 줄 몰랐던 여성분이나 어르신, 사회 초년생분들이 저를 만나 교육을 받고 안전하게 운전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권 씨의 최종 목표는 레이싱 대회에서 1등은 해보는 것. 권 씨는 "만년 2위"라며 "대회에 다시 출전해 1등을 하고, '올해의 드라이버상'을 수상하는 것이 선수로서의 바램"이라고 밝혔다.
[디지털뉴스국 신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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