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취업 커뮤니티에는 공채 시기 때마다 올라오는 '꾸준글'이 있다. 이력서 작성 시 직무능력과 관계없는 항목들을 모두 채워야 하냐는 고민을 담은 게시물이다. 부모님 직장, 가족관계는 기본이고 신장, 체중, 시력, 주량, 흡연 여부, 본적, 결혼 여부 등 세세한 개인 정보를 묻는 기업이 많다는 뜻이다. 특히 하반기 공채가 한창 진행되던 지난해 11월에는 가족 구성원 학력, 직장명 등을 거짓으로 기입해도 문제가 없냐는 글까지 올라왔다. 부모님 직장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소위 '빽'있는 지원자를 가려내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걱정에서다.
정부가 개인의 능력을 우선으로 하는 채용 관행을 확산시키기 위해 2007년 표준이력서를 만들어 기업에 보급한 지 올해로 12년째를 맞았다. 표준이력서는 노동부가 직무와 무관한 성별이나, 외모, 나이 등을 이유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제작한 양식이다. 2003년 인권위원회가 '입사지원서 차별항목 개선안'을 발표해 가족관계 등 36개 사항을 기업 지원서 항목에서 제외하라고 권고한 지는 16년째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취업준비생들은 개인의 신상 정보는 물론 가족의 신상까지 털어가며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다. 이른바 '영혼까지 털어가는 이력서'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2016년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상반기 입사 지원 경험이 있는 구직자 168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한 명당 평균 4.7개의 개인정보를 직무와 무관하게 기재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하나도 기재한 적이 없다'는 응답은 전체 응답자의 0.9%에 불과했다. 하지만 기업의 변화는 요원하다. 지난해 2월 구인구직 매칭플랫폼 사람인이 기업 528개사를 대상으로 표준이력서 도입 의향을 물은 결과, 전체의 62%가 '정부의 표준이력서를 사용할 의향이 없다'고 응답했다. 정부의 대책이 모두 권장·권고에 그쳐 강제성이 없기 때문이다.
기업의 무관심 속에 최근 진행된 혹은 진행 중인 공채에서도 취업준비생들이 '불공정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이력서들이 버젓이 사용됐다.
국내 대표 제과업체인 오리온은 지난해 하반기 신입 공채 입사지원서에 가족 직업과 직위를 묻는 문항을 필수항목으로 분류했다. 직업에 더해 직장 내 직위까지 묻는 이력서가 알려지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이력서에 부모님 직업 물어보는 나쁜 기업 오리온 처벌해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게재되기도 했다. 작성자는 이 글에서 "저처럼 인맥도 없고 빽도 없는 평범한 취준생은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이런 나쁜 관행들을 사기업이니 제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내버려 두면 공정한 사회 건설은 영원히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외에도 노루그룹 계열사인 노루비케미칼의 이력서에는 종교, 출석 교회·사찰·성당명과 소재지, 혈압, 음주량, 끽연 등 과하다 싶은 개인 정보를 묻는 문항이 포함돼 있었다.
영원무역은 현재 진행 중인 공채의 이력서 항목으로 취업준비생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영원무역의 이력서 양식을 보면 추천인 항목을 기재하게 돼 있다. 추천인의 이름, 근무처와 부서, 직위, 관계까지 상세히 적도록 해 어떤 사람을 적느냐에 따라 당락이 갈리지 않겠느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 모씨(26)는 "추천인을 적는 난이 있는 이력서들을 볼 때마다 '여긴 무조건 떨어지겠다'하는 생각부터 든다"며 "사측에서는 당락을 가를 일이 없다고 말하지만 빽 없는 지원자와 유력한 빽이 있는 지원자 중 누굴 뽑겠느냐"고 토로했다.
물론 대부분 기업이 일부 개인정보를 필수 기재 항목으로 지정해두지 않지만, 단 하나의 공채조차 흘려버릴 수 없는 취업준비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모든 항목을 채워 넣는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취업준비생 정지민 씨(25)는 "필수항목이 아니라 기입하지 않아도 되긴 하지만 모두 채워 넣는다"며 "어찌어찌 서류는 통과하더라도 면접에서 발목 잡힐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빈칸으로 둘 수 없다"고 울상을 지었다.
과도한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기업들을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은 없을까.
조현진 노무사는 "키, 몸무게, 결혼 여부 등 채용과 관련 없는 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사항이 될 수 있다"며 "손해가 발생했음을 입증하는 게 쉽지 않아 손해배상소송은 어렵겠지만, 형법으로는 가능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조 노무사는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가 모두 달라 정부가 제작한 표준이력서를 법적으로 사기업에 강제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디지털뉴스국 오현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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