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잡아라 잡(JOB)] 은행 박차고 나와 `배고픈` 애니메이션 작가돼보니
입력 2018-11-26 15:00  | 수정 2018-11-26 16:10

안정적인데다 고액 연봉이 보장된 은행에서 일하는 그였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이 무료했다. 본인이 없어도 해당 일은 누구든지 대체 가능하다는 생각에 미치자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행원이 된 지 5년째 되던 해였다.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거든요. 저만이 할 수 있는 일,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었죠."
EBS에서 인기리에 방영한 '미니특공대X', '몬카트'를 비롯해 '파워배틀 와치카','부릉부릉 부르미즈 시즌 3' 등의 시나리오 작가인 신현덕(사진·46) 삼지애니메이션 기획 PD가 말했다. 그는 은행원에서 무협소설작가로 변신, 총 13권의 책을 출판했다. 또 ONG(온게임넷), MBC게임 등 주로 게임채널에서 방송 작가로 일 한 후 현재는 삼지애니메이션 스토리기획 PD로 활약하고 있다.
스토리텔러가 되기 위해 "먼 길 돌아왔다"고 말하는 신 PD. 그러나 돌이켜보면 "쓸 데 없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그다. 3D애니메이션 작가로 이름을 날리기까지 밑거름이 된 신 PD만의 '쓸모있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만나 들어봤다.
소설가는 글을 쓰지 않으면 '백수'나 다름이 없다. 신 PD가 은행을 관두고 나온 후 바로 그 다음해 IMF가 터졌다. 출판사가 픽픽 쓰러지는 통에 신 PD는 글을 쓰고 싶어도 못 써 백수가 됐다. 행원 시절 한달 월급이 200만원 훌쩍 넘었던 그는 서너달 밤낮 글만 써도 400만원을 채 벌지 못했다. 연봉으로 따지면 1000만원가량에 불과했던 배고픈 무협소설가 시절이었다.
"오죽 힘들었으면 은행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는 꿈을 꾸기도 했어요. 안정적인 직장인으로 정말 돌아가고 싶었던거죠. 출판사 사장님이 제가 은행에 사표 낸다고 했을 때 그렇게 말렸었는데... 직장은 그대로 다니면서 무협 소설은 취미로 쓰라고요(웃음)."
그러나 취미로만 하기에는 글 쓰는 일이 너무 좋았다. 대신 생계는 유지해야했기 때문에 '투잡(two job)'을 뛰었다. 게임을 잘하면서 글도 잘 썼던 그는 게임방송 작가로 글쓰기를 이어갔다.
"운이 좋았어요. 처음 무협 소설을 쓰던 곳이 하이텔 동호회 게시판이었는데요. 그 동호회를 통해 알게 된 게임방송 PD로부터 작가 제안을 받았죠. 무협 소설을 쓰느라 격투기 등을 잘 봤는데 그게 또 게임 방송을 실감나게 묘사하는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13년간 그렇게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 또 게임 방송 진행까지 하면서 지낸 그를 애니메이션 작가로 변하게 한 건 다름 아닌 그의 '아들'이었다. 유아동 콘텐츠를 만드는 대부분의 이들이 관련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는 자신의 자녀와 연관이 있다. 일종의 소명 의식으로, 자녀가 보다 나은 콘텐츠로 유익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 큰 영향을 미친다. 신 PD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들이 다섯, 여섯 살때 처음 '최강전사 미니특공대'의 외주 시나리오작가로 일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들 녀석이 미니특공대를 너무 좋아하는거에요. 뿌듯했어요. 그러면서 각종 애니메이션을 보며 가슴이 두근두근했던 제 유년시절이 떠오르더라고요. 어렸을 때는 이런 만화나 책이 세상으로 가는 문이 잖아요. 애니메이션 작가로 계속 일하고 싶더라고요."
방송작가 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 능력 등을 인정받은 그는 삼지애니메이션에서 2015년부터 작품 기획과 시나리오 개발을 맡고 있다. 관련 업계에서 회사 규모로 10위 안에 드는 삼지애니메이션은 '몬카트'와 '최강전사 미니특공대' 외에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프랑스와 '기상천외 오드패밀리', '외계인 붐', '미라큘러스 : 레이디버그와 블랙캣' '작스톰' 등을 공동 제작해 주목을 받은 곳이다.
미니특공대 캐릭터 [사진제공 = 삼지애니메이션]
신 PD는 디즈니는 물론 미국 카툰네트워크, 프랑스 자그툰, 매서드 애니메이션, 일본 토에이 등 해외 큰 기업들과 많은 작업을 진행해 3D 애니메이션 노하우가 풍부한 삼지애니메이션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말한다. 특히 몬카트와 같은 작품은 일본의 베테랑 작가인 야마구치 료타와 함께 작업하며 "매일 스스로 발전한다는 기분"을 느꼈다.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애니 전문 작가가 없죠. 프리랜서 작가 생활도 힘든데, 애니메이션 작가로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니까요.그러다보니 전문가 등 좋은 인력 수급이 어려운 곳이 국내 애니메이션 작가 시장인데요. 그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전문 작가와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었죠. 많이 배우면서 남다른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물론 해외 유명 작가들과 협업하며 어려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일본 작가들은 2D애니메이션에 지금도 익숙하다. 따라서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야하는 3D 애니메이션은 생소해 이 과정에서 신 PD는 끊임없이 얘기를 나누며 조율의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마저도 배움의 연속이라고 표현하는 신 PD.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업은 건축으로 치면 건축물의 콘셉트를 잡고 설계도를 만드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일'이다. 그렇게 생명을 불어넣은 캐릭터들은 하나 하나 다 소중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애정이 가는 캐릭터를 딱 하나만 꼽아달라고 하자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볼트, 새미, 루시, 맥스'를 꼽으며 활짝 웃었다. 시즌 1에 이어 시즌2까지 인기를 끌고 있는 미니특공대의 캐릭터들이다.
"그냥 이 친구들만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귀여운 동물들이지만 일단 변신하면 통 큰 액션을 보여주는 작은 영웅들이죠. 제가 처음 애니메이션 전문 작가로 발을 딛게 한 친구들이니 더 애정이 가는 게 사실이에요(웃음). 이 친구들 덕분에 아들 녀석과 함께 얘기도 많이 나눴고요. 미니특공대는 중국에서도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예상보다 큰 관심이에요. 서둘러 지금 시즌 3을 준비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죠."
미니특공대의 또 다른 변신 모습을 기대해도 좋다는 그는 유튜브 등 새로운 채널에서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한 작업도 현재 준비하고 있다. TV만화를 즐겨보던 아들 녀석이 지금은 초등학생이 돼 유튜브에 푹 빠져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 입장에선 유튜브를 즐겨 보는 아이들이 걱정될 수 있어요. 하지만 요즘 세대에는 거스를 수 없는 소통의 채널이 된 것 같아요. 애니메이션 업계도 그래서 바뀌고 있고요. 공들여 만든 애니메이션 필름도 중요하지만 이를 활용해 아이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물론 시행착오를 겪을테죠. 그렇지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세상 살면서 쓸데 없는 일은 없다니까요. 다 시도해 볼 겁니다."
[디지털뉴스국 방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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