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쇠락하는 제국 황실에 핀 예술 꽃
입력 2018-11-18 10:57  | 수정 2018-11-18 16:34
김규진, 대한황제 초상, 1905년 추정, 채색 사진, 33x22.9cm, 뉴어크미술관 소장

검은 통천관을 쓰고 붉은 강사포를 입은 채 어좌에 앉아 있는 고종(1852∼1919)이 슬퍼보인다. 1918년 그려진 이 초상화는 일본 왕족 이방자(1901~1989)와 정략결혼시킨 후 일본에서 살게 한 일곱째 아들 영친왕(1897~1970)에게 준 선물이다. 일본의 볼모로 잡혀 있는 아들을 향한 부정(父情)의 증표이자 황실 일원임을 증거하는 어진이다.
곽분양행락도
영친왕은 1963년 병세가 악화돼 귀국했지만 이 초상화는 1966년 한국으로 왔다. 당시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지만 이방자 여사가 신아일보를 통해 "우리 집에서 놓고 보던 그림이다"고 증언해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중이며 화가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이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전통 안료를 사용했는데도 서양 유화처럼 색채가 짙고 화려하다. 의복과 휘장에는 서양식 명암법이 두드러지며 어좌의 용머리 표현도 전통 방식이 아니다. 구한말 외세가 밀려오면서 대한제국(1897~1910)의 예술도 격동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서양 안료와 기법 등이 전통 궁중 미술을 바꿔놓았다.
해학반도도(227.7x714cm), 호놀룰루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시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내년 2월 6일까지)에서 고종과 순종(1874~1926) 시기 궁중미술을 조명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 미술 전통이 쇠락했다기보다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미술로 진화했다는데 방점을 둔 전시다. 당시 회화, 사진, 공예 200여점을 통해 대한제국 시대 미술이 어떻게 한국 근대미술 토대를 마련했는지 보여준다.
이나라 저나라로 흩어졌던 망국의 백성들처럼 국외로 나갔던 미술품도 오랜 만에 고국을 찾았다.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미술관이 소장한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가 이번 전시장에 걸렸다. 1902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비단에 채색과 금박을 입힌 12폭 대형 병풍(227.7x714cm)이다. 조선 전통에서는 보기 드문 화려한 채색과 금박을 활용해 상서로운 구름과 천도 복숭아 나무 위를 나는 학 10마리를 그렸다.
1918년 고종어진
금가루로 쓴 '군선공수임인하제僊拱壽壬寅夏題)'를 통해 임인년 여름, 황실에 바쳐진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02년 여름은 고종 황제의 황수성절(皇壽聖節·임금의 태어난 날을 경축하는 명절)을 기념한 진연이 열렸던 때다. 화면 전면에 활용된 금박은 대한제국과 황실의 번영을 축수하는 의미로 보인다.
이 작품은 역사의 부침 속에서 1922년 도미타 기사쿠(1859~1930)와 야마나카 상회에 팔렸다가 1927년 호놀루루미술관이 소장하게 됐다. 대한제국 황실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녹아 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이 소장한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도 귀국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작품으로 추정되며 10폭 병풍(139.6x366cm)이다. 그림 주인공인 곽분양(697~781)은 중국 당나라 때 사람으로 출세와 장수의 상징이다. 이 작품은 하인리히 마이어(1841~1926)가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마이어는 1883년 조선 최초 외국계 회사인 세창양행을 세운 인물이다. 독일 영사로도 활약하면서 조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마이어 컬렉션 대부분은 대한제국 시기 우수한 작품들이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으로 익숙한 신식무관학교 군인이 등장한 불화도 눈길을 끈다. 1907년 제작돼 공주 신원사에 소장된 '신중도'다.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 무리를 그린 불화다. 앞 열 중앙의 호법신이 대한제국 군복과 군모를 착용하고 있다. 대한제국이 새롭게 출현한 신식 군인의 강력한 힘으로 수호받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미스터 션샤인' 고종 역할을 맡은 배우 이승준이 특별 홍보대사로 가이드투어를 이끈다.
미국 뉴저지 뉴어크미술관이 소장한 '대한황제 초상' 사진도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1905년 궁내부 대신 비서관 김규진이 찍은 대한제국 황제의 공식 초상 사진이다. 미국 철도·선박 재벌이었던 에드워드 해리먼(1848~1909)이 1905년 대한제국을 방문했다가 고종 황제로부터 하사 받았으며 그의 사후 1934년 뉴어크박물관에 기증됐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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