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버닝` `암수살인` 조연 이봉련 "은은한 전등빛 같은 배우 될게요"
입력 2018-11-08 15:01  | 수정 2018-11-16 11:16
/사진=한주형 기자
[나는 조연배우다-25] 사진작가를 꿈꾸던 소녀가 있었다. 세바스티앙 살가두처럼, 인간과 세계상의 진실을 지그시 응시하는 작가. 스티브 매커리처럼 세상사 무심한 풍경 속 영혼의 심층을 길어 올리는 작가. 소녀는 이들처럼 다큐멘터리스트의 길을 걷고 싶었다. 매커리의 다음 경구를 가슴 한 구석 정언명령처럼 아로새긴 채.
"당신이 시간의 여유를 갖고 기다린다면 사람들은 당신의 카메라란 존재를 잊을 것이고, 사람들의 영혼이 사진 속으로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멀고도 험준했다. 제아무리 시간을 갖고 기다려봐도 생의 진실은 쉽게 포착되지 않았다. 조막만 한 손에 쥔 카메라는 더없이 무거웠고, 렌즈 속 세계는 뿌연 안개처럼 흐릿했다. 나날이 회의감이 밀려왔다. '이 길이 내 길이 맞는 것일까.' 밀물처럼 밀려드는 불안에 소녀는 자주 몸서리쳤다.
그럴수록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아는 게 없어서라고, 보는 눈이 없어서'라고, 스스로를 벼랑 끝에 몰아붙였다. 지식의 과포화 상태에 접어든 건 그래서였다. 베냐민의 문예 이론을 탐독했다. 소쉬르와 라캉, 프로이트를 두고 씨름했다. 광대한 미학사의 바다에 뛰어들었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차이밍량 류의 거장들 영화에도 심취했다.
하지만 이 모두 강박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예술가로서 살아야 한다'는 자발적 족쇄와 올가미. 글을 쓰고, 클래식을 듣고, 숱한 책들을 읽으며 사진 이외 분야로까지 내적 지평을 넓혀갔으나 거기까지였다.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게 사진이었다. 한 때 전시회도 가졌지만, 그 뿐이었다. 무서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무대와의 연은 그즈음 닿았다. 때는 2000년대 초중반. 나날이 무기력하고 우울했던 그는 기분 전환 겸 뮤지컬 학과에 지원한다. 그러다 어느 연출가의 부탁에 조연출 일을 떠맡고, 한 배우 권유로 극단 오디션까지 넣는다. 별 뜻 없이 수락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일은 그의 생애 최대 변곡점이 된다. 생애 첫 무대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2005)에 오르는 것이다. 그때 나이 스물 넷이었다.
배우 이봉련(37)은 사진학도에서 배우가 된 특이 이력 소유자다. 사진에서 연극으로, 연극에서 영화로 이행한 그는 현재 충무로가 주목하고 있는 30대 여배우다. 최근 필모그래피만 봐도 알 수 있다. 내노라하는 감독들 수작에 그의 이름은 거의 빠짐 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는 극의 초반부를 빛낸 조연이었다. 지난해 '옥자'(감독 봉준호·2017)가 한 예다. 배경은 서울 미란도코리아 로비. 그는 사라진 옥자 찾아 혈혈단신 방문한 미자(안서현)를 성가신 듯 흘긴다. 유리 벽면 저 멀리서 안내 데스크에 앉은 그는 불량하게 다리를 꼰 채 툭, 하고 내뱉는다. "전화로 하세요, 전화."
영화 `택시운전사`(2016)에서 배우 이봉련은 극초반 택시기사 김만섭(송강호)의 택시를 얻어 타는 만삭의 여인을 연기했다. /사진제공=쇼박스

'택시운전사'(감독 장훈·2017)에서도 그는 잠깐이나마 빛났다. 배경은 극 초반 데모 시위로 한창인 서울 거리. 툴툴대던 소시민 기사 김만섭(송강호)에게 공짜로 택시를 얻어 타던 만삭의 여인이 바로 그였다. 그리고 '버닝'(감독 이창동·2018)의 중후반부 분식점 신. 사라진 해미(전종서) 찾아 헤매던 종수(유아인)에게 "해미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던 친언니도 그다.
'암수살인'(감독 김태균·2018)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영화다. 연쇄살인마 강태오(주지훈)의 진실을 소상히 아는 건 그의 사연 많은 친누이였다. 이봉련이 분한 그는 극 초반 22여분 쯤 한 번, 극 말미 95분 쯤에 한 번 나온다. 형사 김형민(김윤석)의 탐문에 처음엔 모르쇠로 일관하던 그는 종래엔 흐느끼며 폭로한다. 아버지를 죽인 것이 누구였는지를. 왜 자신도 이를 덮어둘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냥 모른 척 했습니더, 저도 차라리 아버지가 없어지길 바랐으니까…. 내 입만 다물고 살자…."
그러니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양손에 카메라를 쥔 일상이 카메라 앞에 서는 일상으로 변모했을 때, 그런 삶의 지속이란 과연 어떤 느낌인 것일까, 하고.

-'찍던' 삶에서 '찍히는' 삶을 살고 계세요. 카메라가 매개인 건 마찬가지이나 서로 판이한 삶이리라 여겨지기도 해요.
▷예전엔 사진을 관두고 연기를 시작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예요. 둘 다 비슷한 것 같거든요. 기록하고 보존하는 행위라는 점에서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면 그것이 자료가 돼죠. 시간의 흐를수록 더더욱이요. 그래서 과거엔 사진 매체를 관두고 영화 매체로 이행했다고 단순히 여겼는데 지금은 내가 관둔 게 아니구나, 라는 걸 어렴풋이 느껴요. 배우가 된 것은 제가 지닌 에너지가 한층 확장된 것이라고 여겨요.
-사진을 관둔 건 어떤 연유에서였나요.
▷자신이 없어서예요. 생활비를 어떻게 마련할 지도 막막했고요. 혼자서 사색하고 그 사색의 결과를 카메라에 담아 전시를 여는 것으로는 도무지 벌이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고민하다 자신이 없어져서 그만둔 거죠. 십여년 전이었을까요. 제가 공연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대학 시절 다큐멘터리 흑백 사진을 가르쳐주신 은사님이 공연을 보러 오신 적이 있어요.
-많이 아끼던 제자셨나봐요.
▷예뻐해주셨죠. 학부 시절엔 정말 죽을 때까지 사진만 찍으며 살것처럼 보냈거든요. "결혼하면 대부분 그만두지 않니"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하시면서도 내심 저를 챙기셨거든요. 어린 녀석이 열심히 하니까 이것저것 더 가르쳐주셨을 테고요. 그랬던 저였는데, 갑자기 그만 둔 게 너무나도 부끄러웠달까요. 한참 연락을 못 드렸어요. 그러다 어느날 부산에 있는 소극장에 공연보러 오시라고 용기 내 연락드렸어요. 그게 '락시터'라는 연극(사연 많은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낚시터가 배경인 창장극. 요금징수원, 불륜 남녀, 껌 파는 할머니 등 다양한 인간군상과 벌어지는 해프닝이 유쾌하게 그려진다)이었어요. 4명이 나오는데 남자가 둘이구요, 1인 다역을 소화해내야 했죠. 아무튼 그날 선생님이 정말로 오셨어요. 좁고 폐쇄적인 공간을 싫어하는 분인데도 말예요.
그는 이 얘기를 털어놓는 게 거의 처음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얼마간 주저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터다. 감추어둔 과거를 말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꽤 많은 용기를 요하는 것이기에.
-무대를 보시고 어떤 말씀을 주시던가요.
▷제 마음을 헤아리셨던 것 같아요. 이런 격려를 해주시더라고요. "네가 사진을 관두고 다른 일을 한다고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너는 사진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더구나. 사진 찍을 때 못 다한 에너지를 연기에선 더 확장시킬 수 있을 거야. 그런 네 삶을 지지한다." 그때부터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나는 사진을 관둔 게 아니다, 그때 배운 걸 다른 쪽으로 확장시키고 있는 거다, 라고. 성격상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지금처럼 배우로 사는 게 저는 제 에너지를 가장 확장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해요.
-연극은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서 사진학과를 다닐 때였죠. 앞길도 막막하고 홀로 서울 살이를 하는 것도 만만찮았어요. 당시 서대문구 남가좌동에서 혼자 자취를 했어요. 대학원이라는 게 아시다시피 수업 없으면 노는 시간이 많잖아요. 그럴 때 도서관에서 혼자 연구를 한다거나 그럴 텐데, 저는 소위 날라리 같은 생활을 했어요. 공부 하려고 갔던 건데 진로 결정을 못 내리고 사진에 대한 신념도 흔들리던 때였죠. 저는 여태 제 손으로 필름 인화와 현상을 직접 했는데, 서울에 와 보니 상당수가 디지털로 하더라고요. 그런 작업을 하지 않는 내가 유행에 뒤쳐지는 건가, 흑백 사진이 별 의미가 없는 건가, 회의가 스멀 스멀 밀려왔고요. 그러다 공부는 안 하고 무료해지고 심심해지니 다른 걸 해보고 싶었어요. 에어로빅이나 한국무용 같은 걸 해보면 어떨까. 물론 취미로요. 그러다 뮤지컬학과가 눈에 띄더라고요. 커리큘럼에 합창이 있길래 같이 노래하고 화음 맞추면 참 재미있겠다 싶었어요. 그러다 '싱인 인더 레인'이란 뮤지컬을 처음 봤는데요. 무대 위에 선 박동하 배우가 어찌나 멋지던지요. 그때가 2003년 정도였어요. 뮤지컬학과를 야간으로 지원해 2년 정도 다녔죠.
-그러다 2005년께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2005)로 첫 무대에 오르셨죠.
▷연출가 분이 조연출과 음향 담당을 해보라며 제안을 주셨어요. 그러다 극단 배우 분이 오디션에도 넣어보라고 권하셨고요. 그렇게 시작한 게 14년이나 이어졌네요.
/사진=한주형 기자

이봉련은 1981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났다. 스스로 말하길 "부끄럼 잘 타고, 소심하고 겁 많고, 꿈만 많은" 소녀이자 "공부 못하고, 무작정 쏘다니기만 하는" 아이였다. 공부와는 일찌감치 담을 쌓았다. 그렇다고 노는 아이 또한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무기력과 무의지의 나날들이다. 세상사 지리멸렬하게만 여겨졌고, 건강 또한 좋지 않았다. 고교 입학 한달만에 자퇴한 건 그래서였다. "상상 이상의 일들이 벌어졌죠. 말로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지금 돌이키면 부모님께 크나큰 고통을 안겨드린 것 같아 죄송스러워요."
-그러다 검정고시를 본 건가요.
▷대구에서 시험을 봤어요. 60점만 맞으면 되는 건데 수학인가 과학인가가 어려워 그 한 과목만 다시 봤어요. 7~8개월가량 학원에 다녔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 언니 오빠들까지 남녀노소가 다 있는데, 재밌는 건 아래층에 당구장도 있고 다방도 있다는 거예요. 놀기 좋았죠. 공부만 하면 지겨우니 아래층에서 포켓볼도 치고, 저는 그 옆에서 요구르트 마시고 커피도 얻어 마시고 그랬죠. 90년대 말엔 이런 풍경이 일상적이었어요. 그러다 간신히 60점 턱걸이했고요(웃음).
-내친 김에 예술대학 사진학과까지 도전했어요.
▷집에만 있는 게 영 죄송스러우니까요. 갈 마음이 썩 컸던 건 아니었어요. 오로지 죄송스러움 때문이었죠. 시험 자체는 별로 안 어려웠어요. 실기 시험을 봤는데, 사진 하나를 놓고 이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는 거였어요. 너무 오래돼 기억은 안 나는데, 제나름 모범답안으로 제출했던 것 같아요. 개략적인 사진 역사, 주요 작품과 작가들에 대해 얄팍하게나마 공부해서 갔거든요. 지금 돌이켜보면, 제 고유한 감성으로 썼더라면 더 재밌었을 것 같긴 해요. 아, 사진과를 택한 건 큰 이유는 없어요. 마땅히 준비할 게 없어서 택한 거였어요. 대학생들 삶이 자유로워보였고.
-만 열일곱에 대학생이라. 영재 소리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은데요.
▷(도리질 치며) 잠시 주목은 끌었죠. 최연소 합격인지라 교내에 소문이 났거든요. 되게 당황스러웠어요. 하지만 영재가 아닌 건 금방 티가 나잖아요. 한 두마디만 나눠봐도 아는 걸요. 화제가 됐다기보단 언니 오빠들이 1학년 때 잠깐 귀여워해준 게 다였어요.
-본명은 이정은이시죠. 이봉련이 직접 지은 가명이라면서요?
▷사진 작가로 활동하려고 서울서 대학원 다닐 때 지은 거예요. 전시랑 프로젝트 할 때 활동명이 필요했거든요. 이름은 막 바꾸면 안 된다는데, 당시엔 재미삼아 고른 거였어요.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거고요. 아, 처음엔 '제갈봉련'이었어요.
-제갈봉련이라, 범상치 않은 가명인데요.
▷그냥 재밌잖아요. 어감도 그렇고요. 재밌고 신나고 특별해 보이고요. 사람이 이름 따라 간다고, 재기발랄하고 신나게 살길 바랐기 때문이었어요. 이 이름으로 전시도 몇 번 했는데, 지금도 도록을 갖고 있어요.
-특이한 친구로 유명했을 것도 같아요.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저는 순수 예술, 그러니까 다큐멘터리 전공이었으니까. 광고 사진처럼 상업 사진 분야로 진로를 택했으면 달랐을 지 몰라요. 협업이 많으니 성격도 더 활발해질 수 있었을 테고요. 하지만 기록 사진 전공이다보니 굉장히 개인적인 작업이 주였어요. 영화 매체랑 협업하기도 하지만 주로 혼자 쏘다니며 '셀렉'해야 하죠. 그러다 서울에 있는 한 대학원 사진학과로 유학을 갔어요.
-첫 상경 느낌은 어떻던지요.
▷제 눈엔 다들 천재 같았어요. 신기했죠. 본인이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는 사람들 같고. 사람들 앞에 자신있게 자기를 소개할 줄도 알고. 반면 저는 그렇게 하진 못했어요. 부끄럼이 많고 누가 혹여 '그건 아니야' 하면 겁이 많아 움츠러들고요. 그러다 혼자 또 사진 찍으러 다니고 그랬죠. 근데 말예요. 저는 흑백 사진을 했잖아요. 제 손으로 필름 인화하고 현상하고 다 했어요. 근데 서울에선 디지털 사진이 주류이고, 포토샵도 배워야 하고, 무언가 내가 유행에 뒤쳐지는 건가 싶었어요. 물론 저처럼 흑백 사진을 고수하는 사람과 디지털 사진으로 갈아탄 사람들이 공존했지만요.
나날이 늘어가는 건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문득 그는 고교 시절을 건너뛴 게 후회된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자격지심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너무 일찍 학교를 갔잖아요.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았어요. 아는 게 없으니까. 다들 저만의 지성을 겸비한 것 같은데, 저만 언제나 모자란 아이 같았달까요."
-그래서 그리 난해한 책들을 탐독한 건가요.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말도 안 되는 책들을 많이 봤어요. 벤야민의 문예 이론이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같은 책, 소쉬르의 기호학 서적들,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 책도 이해가 안 가도 일단 사 읽었어요. 칸트가 얘기하는 미학 책들도 마찬가지였고요. 선배들이랑 팀을 꾸려 발제를 하려면, 저 스스로도 사진을 깊이 알려면, 이런 것들이 전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말예요. 당시엔 그때 저한테 채워지는 게 많다고 여겼는데 지금 돌아와 생각하면 착각이었던 것 같아요. 내 몸에 남는 게 없는 느낌이랄까. 몇 년 전 집 청소하면서 대부분 팔거나 기증했어요. 그리고 하나 더 있는데, 당시 한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크게 영향을 줬죠.
-어떤 말씀이었나요.
▷"사진은 네가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거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그런 것 같았어요. 내가 모르니 사진 안에 담긴 것들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지 않고, 읽히지 않고, 사물 그 자체로만 보여요. 스스로 촬영을 주도하기 어려워지는 거죠. 찍는 사진마다 의미 없이 존재하는 사진이 되는 것 같았고요. 다큐멘터리 전공이니까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의미를 품은 사진을 주도적으로 찍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아무래도 겸양하셔서 그런 것 같은데요.
▷아녜요, 그때도 무식했고 지금도 무식해요. 그래도 딱 하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요. 저 진짜 목숨 걸고 했어요. 처음엔 부모님께 미안해서 시작했다가 이걸 해보고 싶다, 내가 재능이 있다, 그러니 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진 거죠. 근데 이 흑백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게요. 대단한 장인 정신을 요구해요. 작은 온도 변화에도 민감해야 돼요. 보존을 해야 하니까요. 그런 건 자신이 있었어요. 다만 내가 잘 모른다는 것 때문에,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겁이 나기 시작한 거예요. 그 모름의 상태를 인정하기 싫었어요.
-앞서 언급한 책들로 미루어 짐작건대, 영화 보는 수준 또한 만만찮으셨겠어요.
▷예술영화와 독립영화 위주로 많이 봤어요. 혼자 영화제에 가면 7~8편씩 꼭 챙겨 봤죠. 차이밍량의 '구멍'(2000)은 정말 사랑하는 영화예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작품은 혼자 보며 운 적도 많았죠. 너무 아름다워서.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7) 같은 영화가 그랬어요. '성스러운 피'(1994) 같은 컬트 무비도 즐겨 봤는데, 대부분 동숭아트센터에서 혼자 본 것들이에요.
-사진학도로서 '이미지에 대한 강박' 같은 게 있진 않으셨나 싶기도 해요.
▷맞아요, 이미지와 영상에 대한 강박. 일단 머릿 속에 많이 넣어놔야 한다, 내 기억에 아카이브로 구축해놔야 한다는 강박이죠. 당시엔 예술가로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좀 심했던 거 같아요.
-복기하자면 18세에 대학에 들어갔고, 24살에 서울에서 대학원까지 마쳐요. 논문을 안 쓰셨으니 수료만 하셨고요. 부모님은 그런 딸이 기특했을 것도 같아요. 자기 삶을 자기 스스로 개척하고 있으니까. 딸이 사진 작가를 꿈꾸는 것에 대해 부모님은 어떻게 바라보셨나요.
▷안도하셨지 않았겠나 싶어요. 무기력한 방황의 시절을 끝내고 뭔가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집에만 있지 않고 어디든 나가려고 했으니까요. 연년생인 동생은 당시 고교생이었는데요. 대학생이 된 제가 얄미웠을지 몰라요. 저는 자유를 얻은 것처럼 보이니까. 갑자기 외박도 하고, 암실에서 사진 뽑는다고 밤새워 학교 주변에서 놀기도 하니까. 자기는 밤새워 공부하는데 말이에요. 게다가 저는 3학년인 스무 살 때부터 밴을 몰았어요. 촬영 장비를 싣고 다녀야 해서요. IMF로 집안이 녹록지 않을 시기였는데도 아버지 졸라서 차를 끌고 다닌 거죠. 필름값도 엄청 올랐을 때라 사진 찍기도 참 힘들던 때였는데. 필름 인화지에 각종 약품들, 카메라 자체가 다 수입품이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우리 아버지가 엄청난 일을 하신 거예요. 딸 하나 살려보겠다고 딸이 원하는 걸 다 들어주셨으니까요.
/사진=한주형 기자

슬슬 영화로 화제를 옮겨야겠다. 2005년 연극 무대로 데뷔. 그러고 14년이 흘렀다. 2010년 첫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감독 추창민)에 단역 출연한 이래 빠르게 작품 수를 늘리고 있는 그다. 이봉련은 "카메라는 여전히 어렵고 두려운 존재이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리 말하기 힘든 이력이 쌓인 것 같다"며 빙그레 웃었다.
- 첫 영화 촬영에 대해 회고한다면.
▷충격적이었어요. 잠깐 나오는 동사무소 여직원이었는데요. 영화 촬영이 뭐 이리 오래 걸리나 싶었어요. 기다리는 게 힘겹기도 했는데 한편으로 한 컷 찍고 카메라 옮기고 다시 한 컷 찍고 카메라 옮기고 그런 것들이 참 신선했고요. 찍는 거랑 찍히는 거랑 참 많이 다르구나 새삼 느꼈죠.
영화 `옥자`(2017)에서 배우 이봉련은 미란도코리아 한국지사 로비 입구를 가로막는 불량스런 여직원을 연기했다. /사진제공=NEW

-봉준호 감독님 '옥자'(2017)에 짧지만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줬어요. 이런 대사들을 툭툭 던지죠. 옥자 찾으러 온 미자한테 "전화로 하세요, 전화"라고요. 수위한텐 신경질적으로 말해요. "필터링을 해주셔야 한다고요, 필터링!" 봉 감독님이 당시 '가장 주목하는 연극배우'로 꼽기도 했죠. 어쩌면 이 영화가 배우님 삶에 하나의 분기점이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그럴지도요. 봉 감독님이 제가 속한 극단 '골목길'에 공연 보러 자주 오셨어요. 한 번은 '만주전선'이라는 공연을 할 때였는데요. 당시 봉 감독님이 아들과 같이 보러 오셨어요. '옥자' 조감독님 말씀으로는 배우들 사진을 쭉 보여드렸는데 제가 기억에 나신다고 하셨대요. 그렇게 미팅을 했고, 이런저런 대화 끝에 캐스팅됐죠. 제가 찍은 장면은 빠짐 없이 다 나왔어요. 돌이켜보면 촬영 현장이 참 재미있구나, 무섭지만은 않구나, 되게 흥미롭구나라는 걸 느낀 것 같아요. 또 좋았던 건, 그 유명한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님을 현장에서 본 거였어요. 봉 감독님과 다리우스 콘지 감독님이 한 자리에 계시는데, '과연 이게 실화인' 싶고(웃음).
-장훈 감독님의 '택시 운전사'는 그해 천만 영화로 대흥행을 거뒀죠. 이게 오디션 봐서 처음 합격한 작품이라고 들었어요.
▷그전엔 공연 보신 영화 관계자 분들이 연락을 주셔서 출연한 게 전부였어요. 오디션은 거의 다 떨어지곤 했죠. 처음 주어진 역할은 광주 임산부였어요. 송강호 선배님의 시점 숏으로 쓱 지나가는 주변 인물 중 하나였던 거죠. 근데 나중에 조감독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영화 첫 신에 송 선배님 택시 타는 서울 임산부로 바뀌었다고요. "후후후 하하하 으악"하며(직접 시연해 보였다) 산통만 해주면 된다고요. 저한텐 참 소중한 작업이었어요.
영화 `버닝`(2018)에서 배우 이봉련은 사라진 해미(전종서)의 친언니를 연기했다. /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2018년에도 주목해야 할 한국 영화 두 편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어요. '버닝'과 '암수살인'이죠. 일단 '버닝'에선 사라진 해미의 친언니로 분하셨어요.
▷'버닝'은 오디션을 봤는데 초반에 한 번 떨어졌어요. 그러다 영화 제작이 연기됐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후 다시 오디션을 봐 언니 역에 캐스팅됐죠. 대본부터가 정말 아름다웠어요. 제 취향이었죠. 글로 보았을 때 너무나 아름답고 이미지가 많이 떠오르는 시나리오였어요. 예쁜 해미의 친언니를 연기해야 한다는 게 처음엔 의아했지만 '나 성형했어'라는 대사에서 빵 터졌고요. 아, 이창동 감독님은 외모가 닮고 닮지 않고 그런 걸 애초에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 분이신가보다 싶었죠.
-극중에 해미가 살해당했음을 확신한 종수가 친언니가 일하는 분식점에 와서 물어요. 우물의 존재에 대해서요. 해미가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냐고요. 그때 배우님이 연기한 언니는 그 실체를 부정하죠. 해미는 거짓말쟁이라면서요. 우물의 있고 없음이 극에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겠으나, 그 실체를 둘러싸고 해석이 분분했지요. 직접 연기한 배우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이창동 감독님도 물으시더라고요. "봉련씨는 어찌 생각하나요?"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해미한테는 분명히 있지 않았을까 하고요. 반면 언니한테는 그 우물을 볼 마음의 여유도, 시간도 없지 않았을까 하고요. 그만큼 동생을 헤아릴 심정적 여유가 없었던 여자인 거 같아요. 동생의 외로움을 알아봐 주지 못한 거죠. 그래서 해미의 그 외로움을 아는 종수가 우물의 존재를 묻는 건 아마도 이런 의미였을 거라고 봐요. '당신은 해미에게 한 번이라도 관심있게 대한 적이 있어요?' '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진 아셨어요?'
영화 `암수살인`(2018)에서 배우 이봉련은 연쇄살인마 강태오(주지훈)의 친누나를 연기했다. /사진제공=쇼박스

-'우물'은 '외로움'에 대한 메타포가 아닐까라는 해석 같아요. '버닝' 이후 '암수살인'에도 출연하셨어요. 전작이 누군가의 언니였다면 이번엔 누군가의 누나로요. 그것도 연쇄살인마의 누나. 처음에는 자신이 머금은 거대한 사연을 감추지만 조금씩 풀어 헤쳐요, 그러다 마지막에는 사실대로 털어놓고요.
▷본인이 지닌 기억에 대해 큰 죄책감을 지닌 인물이예요. 동생이 살인죄로 복역하는 와중에 김형민 형사(김윤석)가 여죄를 캐물어요. 처음엔 딱 잡아 떼지만 남 얘기가 아니니까 어느 정도는 이야기를 해줄 수밖에 없는 처지의 여자죠. 막바지에 남매의 어린 시절 장면이 나오면서 제가 사실대로 얘기하는 신에 도달해요. 돌이켜 보면 심정적으로 울고 싶고 화내고 싶었을 거예요. 그걸 꾹꾹 숨기고 살다가 털어놓으니 여러 복합적인 감정에 휩쌓일 수밖에 없었던 신이었죠.
-이제 마지막 질문이에요.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를 꿈꾸었다가 배우가 된 지 어언 14년 째에 이르셨어요. 지금 이 삶을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매일 후회하죠. 하지만 사진 작가가 못 된 것에 대한 후회는 아니에요. 제가 아직 배우로서 많이 모자라구나 하는 부끄러움 같은 거죠. 모니터링을 할 때 늘 그래요. 아, 또 대사를 또 얼버무렸네.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이것밖에 못 했네. 아직도 현장을 잘 몰라 당황할 때가 많아요. 그런 실수들이 보이면 번번이 후회하는 거죠. 그러다가도 다시금 용기를 내는 거고요.
인터뷰 내내 겸양하는 그를 마주하면서 '희미한 빛살' 하나를 머릿 속에 그려 보았다. 눈부신 광명까진 아닐 것이나, 은은히 제 자리를 불 밝히고 선 미광 하나를. 때때로 정오의 햇살보다 아름다운 게 새벽녘 골목길의 전등빛이다. 배우 이봉련이 꼭 그래 보였다.
문득 그는 "그저 운으로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냐"며 수줍게 웃었다. "사진학도일 때 그랬듯, 지금도 나는 아는 것이 없다"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분에 넘치는 운과 그간 노력한 시간이 조금 더해진 결과가 아닐까 해요. 그게 맞다면 참 다행일 테고요(웃음)."
은은한 빛은 내세우지 않는 빛이다. 내세우지 않는 빛이야말로 오래도록 빛난다. 그의 삶 또한 은은히 빛날 것이다.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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