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유전자 분석으로 사망 시간 추정
입력 2018-10-17 09:08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사건의뢰를 받고 기차를 타고 이스탄불로 향하던 중 한 명의 승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푸아로는 사망자의 혈흔과 경직도 등을 살피며 사망시각을 추정한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영화로 재구성한 '오리엔트 특급살인'의 도입부다. 영화 배경인 1930년대에도 사망자의 사망 시각을 알아내는데 과학적인 방법이 활용됐다. 지금도 사건현장에 도착한 감식반은 시반(시체 피부에서 나타나는 반점)이나 근육의 경직 정도, 홍채의 반응 정도를 통해 시체의 사망시간을 추정한다. 최근 과학자들은 사망시간 추정에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바로 우리 몸에 있는 '유전자'를 이용하는 것. 나아가 과학자들은 유전자 변화를 분석해 과거 한 개인이 어떤 화학물질에 노출됐는지를 알아내는 연구도 시작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게놈 조절연구센터가 이끈 국제공동연구진은 시체의 유전자 발현 여부를 조사해 부검보다 사망 시간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기존 부검과 함께 이 방법을 활용하면 과학수사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은 DNA로 이루어져 있다. 이 DNA가 RNA로 바뀐다. RNA는 여러 경로를 통해 생명 현상에 필요한 단백질과 같은 물질을 만들어낸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목숨을 잃고 나면 이 과정은 금새 사라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진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기증 받은 540구의 시체로부터 뇌, 간, 창자 등 36개 조직에 있는 피부세포를 연구에 활용했다. 연구진이 모은 샘플은 총 7000여개. 540구의 시체는 사망 날짜와 이를 부검해서 보관하기 시작한 시간 등이 명확히 명시되어 있다. 이후 연구진은 기존에 알려진 인간 RNA 정보와 각각의 조직에 있는 RNA 정보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분석했다. 그 결과 사망한 사람의 몸에서 추출한 RNA는 크게 네가지 '통로(Pathway)'에서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확인됐다. 핵에 있는 RNA는 세포질로 빠져나오거나 단백질 등을 만들면서 최종 부산물을 이끌어낸다. 하나의 RNA가 최종 부산물을 만들기까지 일어나는 과정을 '통로'라고 표현한다. 사망한 사람의 RNA는 노화를 일으키는 'mTOR' 통로나 산소 결합과 관련이 있는 'HIF-1' 통로 등에서 사망시각에 따른 유의미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혜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신경과학연구단 박사는 "논문에 따르면 사람이 사망하고 난 뒤에도 유전자 발현이 일정부분 진행될 뿐 아니라 특정 통로에서는 사망 시각까지 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통계를 확인했다"며 "유전자 변이 뿐 아니라 사망으로 인해 우리 몸에서 나타나는 RNA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연구"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뇌나 비장 등의 조직은 시간 경과에 따른 유전자 활성 변화가 적었지만 근육에 있는 600개의 근육 유전자들은 사후 변화가 빠르게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향후 이 모델을 발전시키면 사망사건 수사시 보다 정확한 사망시간 예측은 물론 사망 원인을 조사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 최신호에 게재됐다.
유전자는 사망 시간만을 알려주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최근 미국 국방성 산하 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DNA에 남겨진 '후성유전학' 표지를 탐지해 개인이 과거에 어떤 화학물질에 노출이 됐는지를 파악하는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DNA가 꼭 돌연변이를 일으켜야만 다른 형질(생명체가 갖고 있는 모양이나 속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흡연이나 음주, 고지방식 식사 등을 하게 되면 DNA에 탄소와 수소가 결합한 '메틸'이 달라붙거나 DNA가 엉켜있는 '히스톤단백질'의 모양이 변하게 된다. 이로인해 DNA가 우리 몸에 필요한 물질을 만들지 못할 뿐 아니라 이같은 DNA 변화가 대를 이어 전달되기도 한다. 이같은 DNA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을 후성유전학이라고 부른다. DARPA는 "화학물질에 노출됐을 때 인간은 이를 DNA에 남긴다"며 "인간은 우리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풍부한 기록을 이제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DARPA는 DNA 변화를 탐지할 수 있는 후성유전학 탐지기를 들고다닐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개발해 현장에 보급한다는 계획이다.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작전상황에서 군대가 어떤 물질에 노출됐는지도 알아낼 수 있는 만큼 즉각적인 현장 의료지원도 가능해질 수 있다.
임혜인 박사는 "후성유전학적 변화는 짧은 시간에 진행되지만 그 흔적은 바뀌지 않고 수십년 동안 유전자에 남아 전달된다"며 "특히 대량살상무기나 핵물질 등에 한번 노출되면 우리 몸의 DNA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만큼 이를 빠르게 탐지해 낸다면 정보 수집을 비롯해 인명을 구하는데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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