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경 작가(40)는 2005년 결혼 후 줄곧 영수증을 모아 가계부를 열심히 써왔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가계부를 써도 안 써도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게 허무하게 느껴져 그동안 모은 영수증을 불태웠다. 까맣게 그을린 영수증과 불에 안 탄 영수증 1400만원 어치를 붙여 모자 달린 외투 작품 '도시환영-완벽한 껍데기'를 만들었다. 1400만원은 주부 노동 가치를 시급 7500만원에 하루 8시간씩 주5일 계산한 연봉이다. 숫자로 가득차 있는 외투는 주부 유니폼이자 그의 정체성 고민의 결과물이다.
결혼 14년차인 정 작가는 "전쟁을 치루듯 아이를 키우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왔지만 가사 노동은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다"며 "주말 부부라서 아이를 혼자 보기 때문에 작업실을 오가는 것도 사치여서 집에서 영수증을 붙이는 작품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정혜경 '도시환영-완벽한 껍데기'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17일까지 열리는 한국여류조각가회 45주년 특별기획전 'I, WOMAN(아이, 우먼)'에 그의 유니폼과 어린이 드레스 작품이 전시돼 있다. 얼핏 보면 영수증 소재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정교한 의상이다. 레이스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어린이 드레스 역시 1400만원 어치 영수증으로 이뤄진 작품이다.이번 전시에선 남성 중심 사회에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여성의 삶이 조각된 작품들이 관람객의 마음을 흔든다. 뉴욕 주립대 FIT(패션기술대학) 유학파이지만 아이 셋을 키우느라 '경단녀'가 된 후 42세에 뒤늦게 조각가의 길에 들어선 이수미 작가(49)의 은세공 개미 작품은 짠하다. 새끼 개미에게 뜯어먹히는 개미도 있고, 온 몸에 구멍난 개미도 있다. 작가는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삶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홍애경 '시간 속의 여인'
홍애경(68) 테라코타 작품 '시간 속의 여인'은 수심이 가득한 여체를 빚었다. 7년전 만난 이 모델은 지금 수녀가 됐다. 존경하던 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아 종교에 귀의했다고 한다.이준영 '하트 사슴'
여성 특유의 따뜻한 시선이 담긴 조각 작품도 발걸음을 붙잡는다. 사슴 뿔에 각양각색 하트 장식이 달린 이준영(44) 작품 '하트 사슴'은 사랑과 희망, 행복이 사슴뿔처럼 뻗어나가길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이혜선 'Space, there(스페이스, 데어)'
이혜선 작가(45) 'Space, There(스페이스, 데어)'는 애틋한 모성애를 표현했다. 격자 무늬 속에 밥 그릇 형태가 곳곳에 놓여 있다. 2006년 작가가 독일 드레스덴 미술대학에 유학 중일 때 고국에 있는 어머니가 매일 밥 한 그릇을 떠 놓고 딸의 건강을 빌었다고 한다. 이 작가는 "어머니가 내가 어딜 가든 굶지 않고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마치 정화수를 떠 놓듯 그릇에 밥을 담았다고 한다"며 "그릇에 복(福)과 만수무강을 비는 문양을 새겨 넣었다"고 말했다.전시장 2층에서는 한국VR아트연구소 조각가 이재혁 VR(가상현실) 퍼포먼스 '깨어나다'가 펼쳐진다. 직장 생활과 육아 모두 '수퍼 울트라 우먼'을 바라는 세상에서 하늘·땅·바다를 상징하는 세 여전사들의 활약상을 3D 입체영상으로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는 심영철 한국여류조각가회장과 회원 80여명의 작품이 어우러져 있다. 이미 고인이 된 김정숙, 윤영자를 비롯해 창립 회원들 작품도 선보인다. 남성이 쥐락펴락하는 조각계에서 작품성으로 승부해온 여성 조각가들의 창작 열정을 읽을 수 있다. 올해 창립 45주년을 맞은 한국여류조각가회는 매년 쉬지 않고 정기전을 열어왔으며 회원 300여명을 두고 있다.
심영철 회장은 "조각을 전공한 여성들이 모여 사회적 발언을 하고 권리를 찾을 뿐만 아니라 우리 서로에게 기회를 주는 미술 전시를 열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지난 5월 28~6월 27일 경기도 양평 C아트뮤지엄 기획전을 이은 서울 행사다. 판매 수익 일부는 미혼모와 성매매경험여성 돕기에 쓰인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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