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1층에 형체가 흐릿한 여성 누드화가 걸려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누기), ×(곱하기) 등 수학 기호와 전자 부호로 구성됐다. 1967년 나온 첫 컴퓨터 누드화다. 미국 전화업체인 벨 연구소 엔지니어 레온 하몬과 케네스 놀턴이 장난 삼아 만든 작품이다. 두 사람은 연구소 동료로부터 사무실을 장식할 미술 작품을 부탁받고 누워 있는 여성 누드 사진 한 장을 컴퓨터로 스캔해 이미지를 재구성했다. 원본 사진은 벨 연구소 동료 엔지니어 맥스 매튜스가 촬영한 안무가 데보라 헤이 모습이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트레이서'
이 작품은 1960년대 뉴욕에서 활동한 예술가와 공학자의 협업체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 기자회견장에서 발표됐다. 1966년 예술가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로버트 휘트먼, 벨 연구소 공학자 빌리 클뤼버와 프레드 발트하우어를 주축으로 설립된 비영리 단체다. 표현의 자유를 갈망했던 예술가와 공학자 6000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팝 아트 거장 앤디 워홀, 비디오 아트 창시자 백남준, 안무가 머스 커닝햄 등 당대 최고 예술가들과도 협업하면서 혁신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이 단체의 작품 33점과 아카이브 100여점을 펼치는 전시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이 9월 16일까지 열린다. 50여년전 작품이라는게 놀라울 정도로 혁신적이다. 박덕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단순히 예술가들이 과학기술을 이용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공학자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예술가들이 품었던 생각이 확장됐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 천정에는 은빛 풍선이 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앤디 워홀이 공학자 빌리 클뤼버의 제안으로 완성한 풍선 오브제 '은빛 구름'(1966년)이다. 가볍지만 공기를 완벽히 밀폐시키는 군용 샌드위치 포장재로 만들었다. 예술의 권위와 관습을 깬 이 작품은 1주일에 1번 헬륨 가스로 채워진다.
높이 2m 하얀색 돔의 정체도 궁금증을 유발한다. 가만히 서 있는 조형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분당 60cm 이하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로버트 브리어 작품 '떠다니는 것들(Floats)'(1970년)로 전시장 안을 돌아다니다가 장애물에 부딪히면 스스로 방향을 바꾸어 움직인다. 작품이 둘러싼 환경에 맞춰 변화한다는게 이색적이다.
백남준 '자석TV'
백남준 '자석 TV'(1965년)는 비디오 아트의 출발을 알린 작품. TV에 자석을 대면 강력한 자기장으로 인해 화면에 다양한 추상 패턴이 맺힌다. 일방적으로 소통하는 대중매체를 관람객이 완성하는 작품으로 만들어 당시 예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E.A.T.' 창립 멤버인 로버트 휘트먼 신작 '서울-뉴욕 아이들 지역 보고서'(2018년)도 선보인다. 서울과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11~13세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각자가 살고 있는 도시 풍경을 촬영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미디어랩과 뉴욕 '컬쳐허브' 스튜디오에서 실시간 영상통화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최근 내한한 'E.A.T.' 멤버인 줄리 마틴은 "예술가와 공학자간 협업이 이제는 문화 일부가 됐다. 'E.A.T.' 노력이 예술과 기술에 대한 담론을 활성화하고 더 큰 가능성을 발견하고 진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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