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전문] 이헌재 전 부총리에게 듣는다
입력 2018-06-26 18:01 
매일경제신문과 대담 중인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한주형 기자>

6·13 지방선거 이후 다들 보수의 궤멸을 말한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국가나 사회도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견제와 균형 속에 돌아가는 법. 날개 꺾인 보수가 직면한 '영적 진공상태', 반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진보세력에 찾아든 '자만의 포만상태'. 결코 바람직한 대한민국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20년 전 외환위기 당시 대한민국 경제의 조타수를 맡았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현 여시재 이사장)를 만나 최근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고민과 활로에 대해 들어봤다. 이 전 부총리와의 인터뷰는 지난 22일 광화문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종로구 적선동 사무실에서 있었는데 오후 2시부터 2시간 넘게 진행됐다.
- 6 ·13 지방선거는 대한민국 보수 야당에 조종(弔鐘)을 울렸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헌재 전 부총리 = 이번 지방 선거는 보수 세력으로부터 보수 정당이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면 됩니다. 보수정당이 보수세력을 대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필연코 다음 총선이 열리는 2020년까지도 그럴 겁니다. 보수 정당은 남아있으면서도 보수 세력을 대표하지 못하는 기묘한 현상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 반면 집권 세력으로 사람이 모이는 현상이 민주당의 스펙트럼을 진보부터 보수까지 아우르도록 넓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이런 정치적 현상들이 지난 2016년부터 진행돼왔고 그 결과가 지난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압도적 승리로 나타난 것입니다.
- 보수 정당이 보수 세력을 대변하지 못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 고 박세일 교수가 언급했듯이 보수는 기득권에 안주했고, 변화를 거부했고, 공동체를 외면했습니다. 그건 이름만 보수지 수구 반동에 다름 아닙니다. 그 수구반동의 숙주(宿主)가 2016년에 죽었습니다. 촛불혁명 이전인 그해 4월 총선에서 죽은 것입니다. 당시 총선 때 보수 정당은 '개헌선까지 당선이 가능하다'며 자만에 들떠 내부 분열을 했고, 급기야는 친박이 아닌 후보들 위주로 '공천 학살'까지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무참하게 깨졌습니다. 이미 그때 숙주는 궤멸한 것입니다. 보수 정당의 구성원들은 오랫동안 그 숙주에 기생해오며 근근이 살아왔던 '기생충'이었습니다. 국민은 그 기생충들에게 이번 지방 선거 때 회복할 수 없는 일격을 가한 것입니다. 잘못된 권력에 기생한 마지막 세력이 지금의 보수 정당이고, 구성원인 국회의원들은 월급쟁이로 전락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보수 정당은 보수세력을 대변할 수 없고, 결국 2020년이면 없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 '숙주'와 '기생충'이라는 비유가 참 충격적입니다. 숙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신다면.
▷ 다양한 형태의 권력에 매달려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보수 정권이 바로 숙주였습니다.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 전 대통령 이후 전두환, 노태우를 거쳐 변화 없이 관성적으로 이어지던 수구 세력이 결국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시대에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습니다. 어설픈 욕심이 가세한 것이지요. 촛불혁명은 이같은 무개념적 관성과 허망한 욕망을 '대통령의 권력 남용과 국고 손실'로 규정지었습니다.

보수의 궤멸을 부른 1차 세력은 일부 진보 집단이었지만 중도 세력이 대거 참여해 확산됐는데 그게 바로 촛불혁명입니다. 촛불혁명을 통해 숙주가 부서졌습니다.
- 보수정당이 죽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럼 보수세력도 궤멸된 것인가요? 보수정신은요?
▷ 보수 세력은 수구가 아니고 반동이 아닙니다. 보수 세력은 자연적 흐름의 변화에 따라 지켜야할 가치를 지켜나가면서 개선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와 소유권에 대한 확신으로 표현됩니다. 소박하게 이야기하면 '새마을 정신'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새마을 운동의 구호는 근면, 자조, 협동입니다. 보수는 '사지가 멀쩡하면 내 스스로 힘으로 열심히 살면서(근면),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자조), 돈을 좀 벌면 기부도 하고 사회와 함께 가겠다(협동)'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구 세력이 새마을 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이같은 좋은 뜻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졌습니다. 이런 보수세력은 여전히 대한민국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습니다.
- 그런 인식과 사유를 하는 게 이 땅의 보수 세력이라면, 한국에서 보수 세력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요.
▷ 적어도 20~30대는 사고가 수평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일자리가 부족해 사회적 불만이 팽배해 있고, 이에 대한 해결책에서 방법론이 갈리긴 하겠지만 20~30대는 어느 정도 보수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40대와 50대는 보수와 진보 세력 분포가 치열합니다. 60대 이상은 '반일·반공'으로 대변되는 단순한 세대입니다. 새마을 정신으로 열사의 사막에 가서, 원양 어선을 타서, 월남전에 참전해서 번 돈을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나눠주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중도를 빼고 봤을 때 보수 세력이 30% 정도 될까요? 전 진보보다 오히려 더 많다고 봅니다.
- 지난번 제가 이 사무실에 들렀을 때 러셀 커크의 <보수의 정신>이란 책이 놓여있던 걸 봤습니다. 아마 그 두꺼운 책을 읽으셨을 것 같은데 20~30대가 수평적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 부총리님은 좀 다른 생각을 하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러셀 커크는 20세기 당시 자신이 살던 미국사회의 시대적 상황에 걸맞은 가치를 제공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그가 주장한 평등주의의 배격이나 너무 엄격한 위계질서 준수 등은 지금 다가오는, 아니 이미 다가온 4차산업혁명 시대에는 바람직한 가치는 아니라고 봅니다.
- 이제 진보 얘기를 해보지요. 지금은 진보세력이 우리 사회의 완벽한 주류로 등장했습니다.
▷ 진보세력은 조금 더 나은 단계를 위해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변화의 추구 이면에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위성을 추구합니다. 가치지향적이고 목적지향적입니다. 간혹 변화를 원하는 급진적 성향 때문에 수직적으로 일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 보수라고 변화를 거부하는 건 아니지요. 변화의 속도와 그 결과에 대한 판단이 기준 아니겠습니까. 진보의 문제는 너무나 빠른 변화를 원하기 때문에 부작용을 간과하기 쉽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진보가 취하는 정책은 목표 지향적이고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야하니 결국은 주변을 아우르지 못하는 배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지금의 변화가 뭔가 잘못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의 근저에 깔려있는 생각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보수 세력이 느끼는 불안 아니겠습니까.
- 그런 불안을 느끼는 보수에게 앞으로 희망이 있다고 보십니까.
▷ 저는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지금 불안하다 해서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버렸습니다. 진자가 좌우로 움직일 때 한쪽으로 가속도가 붙으면 그 힘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진자가 끝으로 간 게 이번 지방선거입니다. 하지만 한쪽으로 쏠린 진자는 결국 이퀼리브리엄(균형점)을 향해 움직이려고 합니다. 지금 보수는 영적 진공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2020년이 분수령일 거라고 봅니다. 그 때쯤 저는 보수 세력을 대변하는 제대로 된 보수 정당이 나타날 것으로 봅니다. 물이 낮은 데로 향해 흘러가듯, 비어있는 보수 정당의 공간에 새로운 물(인물)이 찾아갈 것입니다.
- 보수 세력의 회복이 저절로 가능할까요.
▷ 물론 저절로 되지는 않겠지요. 첫째, 시대변화를 충분히 읽어야 합니다. 지금은 변화의 시대입니다. 정치, 외교, 군사, 경제, 사회 모두 변하고 있습니다.
둘째, 유효한 전략, 중국말로는 책략이 있어야 합니다. 변화의 시대에 딱 맞는 전략이어야 합니다.
셋째, 전략을 유연하고 집요하게 추진할 세력이 능력까지 갖춰야 합니다. 전략을 구체화할 멋진 전술을 가져야 합니다. 요컨대 전략과 전술을 추진할 주체적인 세력이 있고 이들 세력이 유능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게 시장의 수용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 세력의 전략과 전술을 맞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게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기존 보수정당은 이 네 가지가 모두 없습니다.
- 기생충들로 꽉 차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새 인물이 자랄 토양이 되겠습니까?
▷ 지금 보수 정당 국회의원들은 재선 가능성이 아주 낮습니다. 이들이 2020년까지 월급쟁이 의원으로 남아있는 가운데 보수의 공백을 메꾸려는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 그럼 진보 진영은요.
▷ 진보는 2016년 보수 정당이 겪었던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할 것입니다. '내부 경쟁만 이기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이 진보 정당을 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지금의 진보 정당이 그때도 지금과 같은 승리를 하느냐는 앞으로 2년간 국정운영에 달려있겠지요. 시대 정신을 잘 떠받들고, 새로운 미래의 지평을 열어 가면 주도세력으로 남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또 한번 정치적 혼란기를 거칠 것입니다. 그건 보수의 새살을 돋게 하는 새로운 토양이 될 겁니다. 지금의 진보 세력은 과도한 성공에 도취돼 있습니다. 일종의 자만감의 포만상태입니다. 성공한 세력은 으레 적과의 대화보다 동지 간의 대화에 더 어려움을 느낍니다. 자신감이 자만으로 치달아 동지들끼리도 일종의 공감대를 찾기가 힘들어집니다. 한 예로 최저임금 1만원 문제도 반대 세력과 대화가 아니라 같은 세력내 대화가 더 힘들었던 것으로 압니다. 결국 속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붙은 것인데 급격하게 올리자는 쪽이 더 셌던 게 아닙니까. 결과는 자명합니다. 모든 전략과 전술은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현실을 직시하려면 편견이나 이데올로기를 배제하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략과 전술이 정해졌으면 그 선택을 납득시키려 최선을 다해 설득해야 합니다.
- 말씀하신 대로 지금 진보는 '자만감의 포만상태'가 꽤 높지 않나요.
▷ 선거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고 걱정했습니다. 절박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한 것이겠지요. 청와대와 정부에게 국민들의 변화 욕구를,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힌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각자가 자기 분야에서 최선의 리더십을 발휘해달라는 신호였습니다. 변화를 수용해 시장이 수용할 리더십을 발휘해달라는 어찌 보면 '절규'였습니다.
- 좋은 말씀 아닌가요.
▷ 국가를 위해서 아주 좋은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밑에 있는 세력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제대로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느냐는 별개 문제입니다.
- 만약 지금 진보가 자만감에 빠져 시장의 수용성 없는 정책을 추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 사회적·경제적 비용을 치를 겁니다. 표면에서 본다면 정치 세력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하지만 밑바닥 세력, 즉 시장에는 일종의 탄성이 있습니다. 말이 안되는 전략은 시장에서 제대로 추진되지 않을 것입니다.
- 진보 세력의 우위가 얼마나 지속될까요.
▷ 현재를 지배하는 세력이 시대의 변화와 요구를 충분히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진화, 발전할 수 있는 유효한 전략을 채택하면 100년이고 200년이고 지속할 수 있을 겁니다. 로마가 공화정에서 과두정, 황제정으로 이행한 후 동로마 서로마로 갈렸지만 로마라는 제국은 지속됐습니다. 시대정신을 읽고 실행할 수 있는 세력과 능력이 있느냐 차이입니다. 새로운 목표가 유용하고, 또 현실에 맞게 진행되면 그 세력에 의한 지배 체제는 오래 갈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대체세력으로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손현덕 매일경제신문 논설실장(왼쪽)과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한주형 기자>

- 이제 본격적으로 경제 얘기로 넘어가시지요. 먼저 구체적인 질문을 하기 전에 한국경제에 위기가 올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 이미 위기는 와 있습니다.
- 정치처럼 경제도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는데 거기에 대처하지 못한 위기인가요.
▷ 크게 보면 그렇습니다. 과거 봉건적 농업 사회의 지주-소작인 같은 수직적 상하관계가 근대 산업화 단계에도 남아 있었습니다. 산업형 공장 모델은 피라미드 조직이기 때문에 상명하복, 조직동일체 원칙이란 기업 문화가 있었습니다. 회사원들끼리 퇴근 후에도 술자리를 함께하며 지냈습니다. 오너와 회사원 관계가 수직적으로 될 수 밖에 없었던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4차산업혁명 시대에서는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요새 화두가 되는 플랫폼 경제이지요. 사람도 바뀌고 조직도 수평적으로 바뀝니다. 피라미드형 산업화 시대가 끝난 데다 정치적인 큰 변화도 있었는데 일부 오너들은 여전히 '내가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최근 여러 문제가 터졌습니다. 시대적 변화와 가치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부서진 것으로 보면 됩니다.
- 그 변화를 수용해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에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과 함께 공정경제가 들어간 것 아닙니까. 특히 최근에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재벌 오너들이 비주력 계열사 지분을 매각하라고 얘기하는 등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데요.
▷ 사실 비주력기업 처분 얘기한 게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74년부터입니다. 당시에 비업무용 부동산 처분 문제까지 얘기했습니다. 외환위기 때인 1997년에도 비주력기업 정리 정책이 있었습니다. 이제 분식회계나 배임·횡령 같은 투명성 문제는 형식적으로나마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분야에선 사회적 인식도 높아져 예전에는 대개 집행유예를 받았던 죄도 이제는 3·4년씩 실형을 살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10년 실형 판결도 나올 것입니다.
기업들이 회계투명성에는 굉장히 신경을 쓰지만, 거버넌스(지배구조)에 대해서는 아직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이 택하는 지주회사 모델이 정답인지 아닌 지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미국은 수없이 많은 비즈니스 유닛이 회사라는 우산 아래에 있습니다. 그게 지주회사와 뭐가 다른가요.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정답은 결국 시장이 선택합니다.
- 그렇게 말씀하시면 지금은 국가권력이 지나치게 기업 지배구조에 간섭하는 것 아닌가요.
▷ 그렇습니다. 비주력 기업 문제만 봐도 시스템통합(SI)과 물류가 핵심인데 4차산업혁명시대에 기업이 택하는 해법은 각기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기업은 상비군을(내부화), 어떤 기업은 용병을(외주) 씁니다. 그건 알아서 할 일이지요. 개인적 생각입니다만 국가의 역사를 보면 용병을 써서 전쟁에서 이긴 사례가 많지 않습니다. 정부가 쉽게 이 방향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유효하면서도 시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해법이 필요합니다.
- 순환출자 해소 속도가 더디고, 재벌의 여러 문제가 해결이 안돼서 정부가 드라이브를 거는 것 같은데요.
▷ 순환 출자의 사회적 경제적 비용 문제를 비교해 봐야 합니다. 지금 기업들이 생존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생존을 해야 스스로 그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기업들이 최적의 해법을 놓고 나름대로 고민할 것입니다.
정부가 최적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은 '자만'입니다. 제가 금융위원장 시절인 1998년에 은행 거버넌스 베스트프랙티스를 만들었습니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해 그렇게 했습니다. 당시엔 자신감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100% 옳은 방향인지에 대해선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 한때는 전문화가 살길이라고 했고, 또 관련 다각화가 바람직하다고 한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글로벌 기업들을 보면 오히려 비주력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나요? 일종의 비관련 다각화인데요.
▷ 경제적 변화를 10년 전, 20년 전 시각으로는 읽지 못합니다. 2000년대만 해도 구글 같은 데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구글과 아마존은 우리 생각에는 '엄한' 투자를 많이 합니다. 경쟁사 사업을 내부화할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래선 안된다'라고 말할 건가요. '한우물만 파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어느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요.
2000년대 초 이헌재가 책상 앞에 앉아서 '우리 기업은 이 방향으로 가야 한다, 쓸 데 없이 저 방향으로 가선 안된다'고 결론 냈으면 지금 우리 기업이 어찌 됐겠습니까. 이제는 산업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고, 연결돼 있습니다. 산업 정책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별적 정책 성공에 너무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시대가 바뀌었는데 여전히 경제정책은 구시대적 사고의 틀에 매달려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 지금 정부는 '탈산업화 시대'에서 '산업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제는 플랫폼 시대인데 정부나 기업 모두 과거의 고루한 산업화의 웅덩이 속에 갇혀있습니다. 마치 전쟁은 이제 서부전선으로 옮겨붙었는데 이미 거의 다 마무리된 동부전선에서 패잔병들과 싸우고 있는 격입니다.
- 그렇게 과거 문제에 집착하는 걸 어떻게 보십니까.
▷ 좋게 말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너무 정직해서 그렇습니다. 대선 과정에서 공약한 것을 지키겠다는 책임감 때문입니다. '공약집 만들 때 나름 검토했고, 최선의 전략적 방향을 만들어냈고, 그걸 국민들에게 약속했으니, 반드시 지켜야한다' 이런 논리입니다.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집니다. 또 대통령을 둘러싼 진보 세력의 가치추구적 행태,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너무 강합니다.
- 부총리님도 기업인들은 꽤 많이 만나실텐데 그들은 지금 정부의 대기업 정책에서 일종의 적개심 같은 걸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문재인 대통령은 인격적으로 적개심을 갖는 성격이 아닙니다. 옳은 방향을 선택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고 봅니다. 어느 사회나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걸 부추기는 세력이 꼭 있습니다. 이런 걸 방지하는 것이 안정적 중간 세력입니다. 그들이 중화시킬 수 있습니다.
- 현재는 안정적 중간세력이 보이지 않지 않습니다. 아예 없는 거 아닙니까?
▷ 부재(不在)가 아니라 부유(浮游)한다고 봅니다. 떠 있습니다. 안정적 중간세력에 속한 사람 스스로가 거기 속해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의견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자신의 미래를 합리적으로 결정해야할 30-40대의 적극적인 역할에 기대를 가져봅니다.
- 구체적 정책에 대해 물어보겠습니다. 소득주도성장은 무엇이 문제라고 보십니까.
▷ 탈 산업화 시대에는 맞지 않는 정책입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대표적인데 이는 전세계적으로 고용형태가 정규직에서 탄력적으로 다양하게 바뀌고 있는 추세의 역행입니다. 앞으로 생길 다양한 탈 산업화 직업에서 산업화 시대 정규직 종신고용 모델을 강요하면 마찰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은 사실 '미스타겟팅(mistargeting)'이란 단어가 딱 들어맞다고 봅니다.
- 소득주도성장은 방향을 잃은 정책이라는 말씀이신데요.
▷ 거시경제 원리(국민소득 3면 등가의 법칙)로 경제사를 뒤돌아보면 하이에크는 생산에, 비스마르크는 분배에, 케인즈는 지출에 촛점을 맞췄습니다. 하지만 실제 현실 경제에서는 세 개의 바퀴축이 동시에 다 돌아갑니다. 어느 한바퀴만 굴러가는 게 아닙니다. 이 정부는 분배에만 너무 많은 관심을 갖고 그쪽 정책을 과도하게 쓰려 합니다. 사실 소득주도 정책이 이 정부에서 새롭게 나온 정책은 아닙니다. 농어민, 최하위계층을 위한 소득 정책은 오래전부터 했습니다. 다만 이 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1만원 같은 큰 정책에 몰두합니다. 소득 보조를 계층별로, 분야별로 어떤 형태로 할 지 깊이 파고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과거엔 데이터가 부족해 이런 정밀한 정책을 못 만들었는데 지금은 가능합니다. 앞으로도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계속 하려면 정밀하게 해야 합니다.
- 정밀한 정책이라는 건 다른 측면에서 보면 효과를 감안해 우선 순위를 명확하게 하는 정책이라고도 보여집니다. 맞습니까. 부총리님은 만약 가장 역점을 둔다면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 청년, 최하위계층 등 지원 대상이 많지만 저 같으면 출산 문제를 가장 시급하게 해결하려할 것입니다. 나라 재원의 상당부분을 출산을 준비하는 신혼부부에 맞추는 것입니다. 출산-육아-교육 정책이 모두 아이를 더 낳고 쉽게 키우는 쪽으로 바뀌어야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소득정책이 아닙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분야에서 새로운 사회 서비스 일자리를 많이 만들게 됩니다. 일자리 정책이 되기도 합니다.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면서 비즈니스가 활성화 되고 이것이 다시 소득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고리를 형성할 것이라고 봅니다.
두번째로는 미국 NASA와 같은 종합적인 국가전략 프로젝트 구상에 매달리겠습니다.
-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그 방향으로 가는 게 맞긴 합니다.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저임금을 받는 근로자들이 일하는 시간을 늘려 월급을 채웠습니다. 이제는 근로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생산성을 높여야 합니다. 그게 맞는 방향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너무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무조건 따라오라고 하는 것은 안됩니다. 너무 강요하면 기업들은 생산성을 높이려 자동화·기계화 수준을 더 끌어올리려 할 것이고, 노동자들이 이에 저항하며 노사 분규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일자리는 줄어들겠지요. 모든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있어 단 칼에 쉽게 풀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업들이 자기 사정에 맞게 탄력적으로 적응해 가도록 여유를 줘야합니다. 스스로 문제를 풀 시간을 주라는 말입니다.
- 혁신성장에 대해 묻겠습니다. 벤처를 육성하는 환경은 어떻게 만들어야 합니까.
▷ 정부가 직접 벤처 펀드를 만드는 건 기초연금이랑 다를 바 없습니다. 초기 벤처가 아이디어만 있으면 큰 돈이 안들게 해야 합니다. 창업보육센터를 많이 만들어 거기서 일할 수 있고, 법률 컨설팅 회계서비스도 제공해줘야 합니다. 정부가 벤처에 돈을 직접 주는 것보다 그런 '벤처 놀이터'를 많이 만드는 게 좋습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 서로 부딪히며 놀이하면서 인간관계를 배워나가듯, 벤처하는 사람들이 모여 정보와 지혜를 교환하고 또 이들을 돕는 이해관계자도 모이게 하는 놀이터 문화를 육성해야합니다. 벤처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데 당장 돈 한푼 없는 사람이라면 정부가 일정기간 수당을 줘서 나중에 성공한 후 갚게 하는 방식도 있다고 봅니다.
- 지금의 탈원전 정책을 놓고 말들이 많습니다. 월성1호기 조기폐쇄로 시끄럽기도 하고요. 어떻게 보십니까.
▷ 앞으로 4차산업혁명 초연결 사회에서 획기적으로 변화해야 할 부분 중의 하나가 에너지입니다. 에너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 수 있습니다. 에너지 가격이 국가 경쟁력을 제한하는 요인이 됩니다. 저는 우리가 앞으로 4차산업혁명에 따른 변화가 어찌될 지 자세히 들여다 본 후에 탈원전을 결정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대체에너지를 활용하면 된다고 하는데 아직은 비용 효율성이 떨어지지 않나요. 보조금을 줘가며 전력을 생산하면 다른 데로 갈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쓰는 것입니다. 멀쩡한 나무 자르고 산림 지대에 태양광 시설 짓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앞으로 수소 에너지가 등장하면 상당한 변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현재와 미래에 맞는 유효한 에너지 전략을 짜야합니다.
- 외교·통일 분야는 부총리님 전공은 아니나 최근 많은 관심을 갖고 보시는 걸로 압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급변하고 있고 이는 비단 정치 뿐 아니라 경제에도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까.
▷ 외교 또 남북문제는 다기화(多岐化)됐다고 봅니다. 과거 남북관계는 그야말로 한반도에 국한된 문제로 무척 단순했습니다. 이제는 남북한 뿐만 아니라 미·일·중·러가 모두 관여하는 모양새입니다. 지금 우리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지속가능한 책략을 자주적·적극적으로 찾아야할 때라고 봅니다. 두 강대국이 계속 밀고 당기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름의 포지션을 정하고, 한미관계와 한중관계를 어떻게 할 지 아주 깊은 생각이 필요한 때라고 봅니다.
- 통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 감성적인 통일론에 매달리지 말아야한다고 봅니다. 통일을 목표로 하면 해결책이 더 복잡해집니다. 우선은 한반도 평화 정착에 힘써야합니다.
-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북회담 때 평화와 번영을 얘기했었지요. 통일과 함께.
▷ 번영은 수사적 단어입니다. 남북한 사이에 체제가 다른데 공동 번영이 가능하겠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번영은 체제가 같을 때나 쓰는 말 아닌가요. 지금은 공동 번영대신 공존이란 단어를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미국은 비핵화 단계별로 북한에 줄 대가를 한국이 상당부분 대도록 요구할 것이 분명합니다. 남북 경협도 경제적, 사회적 비용이 소요되고요. 철저히 계산해야 하고 흥분하거나 들떠서는 안됩니다. 북한 개발 비용만큼 한국 안에 사용할 자원은 줄어듭니다. 그게 경제원리입니다. 북한을 정부 재원으로 지원하는 건 미래의 빚이거나 현재의 기회비용 상실입니다.
다만 남북 경협으로 우리 기업에 기회가 생길 수는 있습니다. 한국 경제는 시기별로 '특수'가 생겨 경제 지평을 넓혀 왔습니다. 정부 수립 직후에는 미국의 원조, 60년대는 일본의 식민지배 보상금, 70년대는 월남전과 중동 개발 등입니다. 90년대 후반이후 중국 특수를 누려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남북 경협은 새로운 특수를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상대적 사이즈로 봤을 땐 중국 특수만은 훨씬 못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He is...
▲1944년 중국 상하이 출생 ▲경기고·서울대 법학과 졸업 ▲보스턴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1968년 제6회 행정고시 합격 ▲1984년 대우반도체 대표이사 전무 ▲1985년 기업금융정보센터·한국신용평가 사장 ▲1999년 초대 금융감독원장 ▲2000년 재정경제부 장관 ▲2004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현)여시재 이사장
[대담 = 손현덕 논설실장 / 정리 = 조시영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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