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매경이 만난 사람] 취임 한달 맞은 김광수 NH농협금융지주 회장
입력 2018-05-29 17:40  | 수정 2018-05-29 20:23
김광수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이 29일 서울 중구 농협금융지주 본관에서 매일경제와 인터뷰하며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했다. [이충우 기자]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고 하면(天將降大任於斯人也·천장강대임어사인야)….' 김광수 NH농협금융지주 신임 회장이 펼친 수첩 한 페이지에 이 한문 구절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맹자의 고자장(告子章)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고통을 주고 굶주리게 하고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고. 이는 그 사람의 참을성을 기르게 해 그동안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과거 선비들은 이 구절로 유배지에서 설움을 달랬으며 중국의 개방을 이끌었던 덩샤오핑도 즐겨 암송한 문장으로 전해진다.
김 회장은 금융·경제 엘리트 관료로 30여 년을 보내다 2011년 부산저축은행 부실 사태 때 뇌물수수 누명으로 구속된 후 290일간 수감 생활을 했다. 그는 어떤 심정으로 한 자씩 꾹꾹 눌러서 이 구절을 적었을까. 공직 생활 후반부에 지난한 법정 공방과 무죄 확정 판결 등을 겪고 '노기근골(勞其筋骨·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삭이면서 썼을 것이다. 파란만장한 관료 생활을 마감했던 그는 지난달 30일 NH농협금융지주 회장으로 현업에 복귀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29일 서울 농협금융지주 본관에서 만난 김 회장은 "평탄하게 살았던 사람보다 고통·고난을 이겨낸 사람이 삶에 훨씬 더 감사함을 느낀다는 말에 공감한다"며 소회를 밝혔다.
―무죄 확정 판결은 '제2의 변양호 신드롬'으로 불릴 정도였는데, 공직에서 물러난 뒤 마음이 어땠나.
▷저도 공직에 있을 때 공무원으로서 양쪽 입장을 다 고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려 했다. 하지만 '중간'에 선다는 건 쉽지 않다. 퇴직 후 로펌에서 근무해보니 각 개인은 정말 억울할 수 있는 일인데, 일단 당국이 결정을 내리면 당사자는 사회에서 도태되더라. 회사 임직원이나 공무원이 징계를 받으면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다. 정책결정자가 더욱 심도 있고 신중하게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수감 생활이 삶에 끼친 영향이 작지 않을 텐데.
▷많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모든 걸 경제와 공무원의 관점에서 봤는데, 이제 보는 시각이 다양해졌다. 그 기간 종교 책을 많이 봤다. 성경을 해설서와 함께 깊이 읽었고, 불교·철학·역사·과학책도 많이 읽었다. 특히 지금도 물리학 신간이 나오면 꼭 읽어본다. 물리학이 인문학보다 훨씬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세상을 본다는 생각도 갖게 됐다. '책 편식'도 줄여서 한 번에 여러 권을 시간대별로 나눠서 읽게 됐다.
―지금 우리 경제를 볼 때 시급한 해결 과제는.
▷최근 읽은 책 '부채의 늪과 악마의 유혹 사이에서'에 크게 공감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영국 금융감독청장을 지냈고 이후 금융개혁 방안을 담은 '터너 보고서'를 쓴 아데어 터너의 저술이다. 터너는 2008년 이후 지금까지 경기가 본질적으로 살아나지 않는 배경에는 '부채'가 있다고 봤다. 부채 때문에 소비 증가가 일어나지 않으며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양극화가 심화됐다고 적시했다. 우리나라도 개인부채, 국가부채 문제가 심각하지 않나. 지금의 경제 문제는 과거 정책으로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터너는 이 책에서 공공부채를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해소하고, 민간부채는 억제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최근 정부에서는 '소득주도 성장론'을 내놓았는데.
▷양극화 문제를 풀 방법을 계속 생각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일본 경제 상황에 관한 책도 꼭 사서 읽는다. 노무라종합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리처드 쿠의 '대침체의 교훈'(원제: 거시경제학의 성배)은 일본 경제 이해는 물론 우리 경제에 대해서도 성찰해보는 계기가 됐다.
―금융업계를 볼 때 가장 중요한 화두는.
▷'고객 신뢰'다. 금융소비자 보호와 고객 신뢰는 과거엔 한 부분이었지만 이제는 금융업 그 자체다. 국내 은행·증권사는 신규 고객을 찾기 어려운 포화 상태다. 흔히들 '관성의 법칙'에 머물러 '한 번 잡은 고객은 안 떠날 것'이란 착각에 빠지기 쉽지만 경계해야 한다. 이젠 '당신을 위해 이 회사가 존재한다'는 걸 고객에게 끊임없이 알려줘야 한다.
―디지털 시기의 생존 전략은.
▷핀테크는 거래비용을 확 낮췄다는 점에서 '금융의 민주화'라는 의미가 크다. 고액 자산가가 아니어도 금융사와 관계를 맺고 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됐다. 반대로 금융업체 입장에선 빅데이터를 통해 고객 성향을 분석하고 개인화가 이뤄지다 보니 과거처럼 '규모의 경제'에 입각해 평균가격으로 상품을 제공해서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게 됐다. NH농협금융처럼 큰 회사는 기업금융, 인베스트먼트 뱅킹 쪽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모바일 시대에 중요한 것은.
▷모바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고객 편의성'이다. 내가 고객으로서 NH농협은행을 이용해 본 경험을 다른 은행과 비교하면, 농협은행의 모바일 플랫폼은 잘 만들어져 있지만 고객의 피드백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고 본다. 나는 요즘 출근하면 직접 애플리케이션(앱)에 접속해 10분 정도 계좌 내역도 들어가보고, 입출금 내역도 본다. 임직원에게도 자신의 사용 경험을 얘기한다. 직접 경험해봐야 안다.

―오픈 API 등에선 특히 앞서 간다는 평가도 있다.
▷취임 후 농협은행이 앞서 가고 있다는 점에서 깜짝 놀랐다. 오픈 API는 농협금융이 가지고 있는 금융정보를 모듈화해 아이디어를 가진 핀테크 업체가 활용할 수 있게 하는 플랫폼이다. 2011년 디도스 공격 사건 이후 엄청나게 고민하면서 하드웨어를 굉장히 선진화시켰고, 그 순간의 선택이 기반을 만들어 앞서간 것 같다.
―글로벌 진출 전략은.
▷중국·인도·베트남·인도네시아 등 4개 국가에 주목하고 있다. 농협금융은 농업이라는 실물경제를 뒷받침하고 서번트(하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전략으로 삼아서 이들 국가에 진출할 계획이다. 어느 나라든 경제가 커지면 외국계 회사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게 마련이라, 장기적 관점에서 거부감을 최소화하도록 접근할 생각이다.
―북한에도 진출할 생각이 있나.
▷앞으로 진행되는 남북 경협 등 상황을 보고 더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북한에도 협동조합이 있고, 농협도 협동조합으로서 생산성을 높여 본 경험이 있으니 노하우를 전수하면서 협력할 수 있는 접점이 많을 것이다. 농협은행의 첫 해외지점이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은 금강산지점이었다는 점에서도 상징적 의미가 있다.
―비은행 계열사 확대 등 과제가 많다.
▷제 임기 동안 생명보험사에 닥칠 수도 있는 위기가 가장 어려운 과제일 것 같다. NH투자증권은 국내 자산 규모 2위의 내로라하는 회사고, 농협은행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NH농협생명은 2021년 적용될 국제회계기준(IFRS17) 등 환경 변화에 직면해 있다. 또 보험설계사(FC), 은행 방카슈랑스 등 판매채널 전략을 세우는 문제도 상당히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취임 전 생각했던 이런 취약점에 대해 충분히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취임 100일쯤 지나면 현업 부서와 두어 번 회의를 통해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방적 보고 대신 실무자와 즉문즉답 토론…낡은 업무관행 깼죠
신임 회장을 맞이한 NH농협금융지주엔 최근 한 달 동안 벌써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휴대전화로 보고를 간소화하면서도 회장 보고 땐 회장과 실무자가 토론을 벌인다. 김광수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은 취임사에서부터 "농협금융이 보수적이고 관료화돼 있다는 일각의 비판이 있다"며 "스마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업무 관행은 전면 혁신하겠다"고 공언했었다.
―농협금융에 직접 와보니 어땠나.
▷'보고서 문화'를 바꾸고 토론을 활성화하고 있다. 내가 일방적으로 보고만 받는 입장보다 함께 토론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실무자가 보고서를 써와서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정작 궁금한 걸 물어볼 시간이 부족했다. 요즘은 실무자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한다. 그래야 실무자도 담당 업무에 대해 종합적 사고를 할 수 있겠더라.
―급한 업무보고는 스마트폰 메신저로 한다고 하던데.
▷직원들과의 소통에 휴대전화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적극 활용하려 한다. 위계질서 탓에 때론 직원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못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쓴 '늦어서 고마워'란 책에서도 휴대전화의 위력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계통에 따라 상사를 거쳐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급할 때는 내게 바로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임직원들이 많이 긴장해야겠다.
▷꼭 그렇진 않다. 세상이 수직적 질서에서 수평적 질서로 바뀌어 가고 있지 않나. 내가 이런 부분을 좀 더 본다는 것뿐이고, 결국 변해갈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익명 SNS 앱 '블라인드'에도 들어가본다. 금융업계 게시판의 글들을 보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취임 후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며칠 전 임직원 세미나에 초청한 농협 선배의 말씀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농협 신용 부문에서 40년 봉직하고 지금은 은퇴하신 선배께서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된다'고 하시더라. 저나 직원들도 뜻을 가지고 일하면 잘되지 않겠나.
김광수 회장은…
△1957년 전남 보성 출생 △1976년 광주제일고 졸업 △1981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83년 행정고시 27회 합격 △1990~1991년 프랑스 파리국제정치대학원·국립행정대학원 △1998~2001년 금융감독위 은행팀장·은행감독과장 △2001년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2004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과장 △2008년 금융위원회 금융서비스국장 △2011년 금융정보분석원장 △2014년 법무법인 율촌 고문 △2018년 4월 NH농협금융지주 회장
[대담 = 김대영 금융부장 / 정리 = 정주원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N APP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