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 `5월 가정의 달`이 두려운 직장인들…새는 주머니 메우려 비상금 모으고, 가불에 소액대출까지
입력 2018-05-04 17:14 

경기도 과천에 사는 기모 씨(37)에게 '5월 가정의 달'은 몇년 전부터 '가불의 달'로 돌변했다.
2년 전부터 어린이날 의미를 알아차린 6살짜리 아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번 어린이날을 맞아 기 씨가 준비한 건 8만원 짜리 로봇세트. 사흘 후인 어버이날은 뭉칫돈 지출이다. 친가와 처가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려면 못해도 40만원이 필요하다. 여웃돈이 사라진 상황에서 이달 말 예정된 아내의 생일은 기 씨를 더욱 움츠러들게 한다. 그는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 모두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연초가 되면 5월에 쓸 돈을 조금씩 모아두는 버릇이 생겼다"며 "5월에 지인 결혼식 몇 개라도 잡히는 해엔 소액 대출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 스승의날, 부부의 날까지 각종 기념일이 집중된 5월이 직장인들 주머니를 가볍게 하는 '지출의 달'로 자리매김하면서 신풍속도가 생겨나고 있다. 40만~50만원 안팎의 뭉칫돈이 빠져나가는 부담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 비상금 대출이나 현금 서비스로 돈을 당겨 쓰는가 하면 각종 행사를 한번에 구조조정(통합)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전남지역 공장 생산라인에서 일을 하는 박 모씨(30)는 "요새 부모님께 드리는 선물은 대부분 현금"이라며 "원래 봉급을 받으면 빠듯할 정도로 많은 액수를 적금에 붓기 때문에 쓸 돈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이번 달에는 신용카드사에서 소액대출을 받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 P2P 대출업계 관계자는 "5월을 앞두고 돈을 빌리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상이 새로운 것이 아니다"고 귀띔했다.

'가정의 달'이 주는 부담은 실제 설문 조사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지난 4일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인남녀 3234명으로 구성된 응답자의 69.1%가 '가정의 달이 부담된다'고 답했다. 이중 44.3%는 지출이 느는 것을 부담의 이유로 꼽았다. 같은 조사에서 응답자 10명중 8명은 5월 추가적인 지출이 있을 것이라 내다봤고, 어버이날 25만 9000원, 어린이날 6만 9000원 등 한 달동안 38만원이 넘는 돈을 쓸 것이라고 예상했다.
가정의 달에 적잖은 부담을 느끼는 직장인들은 소액 대출 서비스 외에도 다양한 방법을 이용해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맞벌이를 하는 안 모씨(36)와 김 모씨(여·36) 부부가 찾은 돌파구는 이른바 '퉁치기'다. 5월에 있는 결혼기념일와 부부의날 축하를 두 사람의 합의 하에 조촐한 외식으로 간소화한 것. 두 아이에게 줄 어린이날 선물과 어버이날 선물, 결혼식 주례를 섰던 대학 은사에게 건넬 정성을 생각하면, 부부끼리 기념일을 챙기는 건 사치다.
여가 생활을 한시적으로 중단해 5월을 대비하는 직장인들도 있다. 직장인 강 모씨(여·27)는 "폴댄스 강좌를 운동삼아 듣고 있는데 이번 달은 등록을 건너뛰었다"며 "필요없는 곳에 돈을 쓰게 될 것 같아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았는데 요즘은 조금씩 고려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5월이 주는 부담감을 전했다. 또 다른 직장인은 유독 쉬는 날이 많은 이번 달에 따로 여행 등 휴가계획을 잡지 않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방법으로 씀씀이를 줄이겠다고 답했다.
이런 '가정의 달 포비아'는 종종 부부 간 갈등이나 죄책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정의 화목을 도모하기 위한 기념일들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이다. 직장인 김주민씨(가명·33)는 어버이날은 물론 양간 친척들의 생일이 몰려있는 5월이면 아내와 설전을 벌이는 일이 찾다. 김 씨는 "맞벌이 부부라 둘다 주말에는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매주 본가인 대구와 처가인 광주를 오가며 오랜 시간 운전해야 하니까 체력적 부담이 상당하다"며 "몸이 지치다보니 부부싸움이 생기는 경우도 잦다"고 토로했다. 사회초년생 이 모씨(26)는 친구의 어버이날 선물에 주눅이 들기까지 했다. 친구와 이 씨 모두 용돈을 꽃과 함께 장식한 '플라워 용돈박스'를 마련했는데, 1만원권으로 박스를 채운 이 씨와 달리 친구는 5만원권을 이용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씨는 "월세와 학자금 상환비, 각종 생활비를 고려해 선물을 마련했지만 친구가 5만원 짜리로 박스를 꾸며 왠지 부모님께 죄송해졌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문가들은 기념일을 하나의 의무로서 받아들이는 문화의 문제를 지적한다. 성미애 한국방송통신대학 교수는 "기념일의 원래 의미가 퇴색됐다"며 "어떤 날에 특정한 역할을 해야한다는 은연중의 압박이 사회 저변에 깔려있다"고 문화의 전반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념일 본래의 의미를 되새기는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성 교수는 "어린이날은 우리 아이 선물을 주는 날이 아닌 아동 전반의 권리와 복지에 대한 생각을 하는 날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상달 사단법인 가정문화원 이사장도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데 더 의미가 있는 달로 생각해야 한다"며 "돈을 쓴다고 마음이 보여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희수 기자 / 류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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