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어느 순간 엄마] (32) 엄마도 `불금`이 필요해
입력 2018-03-06 11:38  | 수정 2018-03-06 16:05

금요일 저녁 8시 반, 00수제맥주집. 예약자명은 '핑클'.
뭔가 재밌고 싶었다. 왕년의 인기 걸그룹 핑클을 예약자명으로 삼은 이유는 단순했다. 이 얼마 만의 '불타는 금요일'이던가.
필참 회식 등 회사 일과 관계된 불가피한 저녁 모임 말고 그야말로 자발적 의지에 의한 사적 모임은 출산 이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엄마만 찾는다는 이유로 불금은 전혀 불가능했다. 애가 조금 커서는 어쩌다 선후배들이 저녁을 함께 하자고 해도 나 좀 즐겁자고 남편 혹은 시어머니, 친정 어머니에게 애를 맡기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그래서 깔끔히 포기했다.

그런데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가도 전혀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될 만남, 그것도 금요일 밤의 약속이 생긴 것이다. 무척 설레었다.
어린이집 문제([어느 순간 엄마] (31) 어린이집 폐원, 한 순간에 무너지는 일상 참고)로 한 차례 홍역을 치르며 동지애가 생긴 엄마들이기 때문에 더욱 특별했다. 당장 애 맡길 곳이 없어질까봐 근심 걱정으로 밤을 지새운 엄마들과 육아에 지친 일상에서 잠깐이라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했다.
"예약자 분 성함이요?"
"피, 핑클이요"
걸그룹 외모와 거리가 먼 난 겸연쩍어 웃고, 맥주집 아르바이트생도 (어이없어) 웃고. 나 뿐 아니라 줄줄이 시간 맞춰 오는 10여 명의 엄마들은 그와 같은 상황에 멋쩍어 했다. 하지만 모처럼 '추억'을 돋으며 웃을 수 있었다.
87년생부터 70년생까지 띠동갑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났지만 금세 '언니, 동생'이 됐다. 전업맘과 워킹맘의 구분도 무색했다. 대한민국에서 세살배기 자녀를 키우는 엄마로서, 더 나은 환경 속에서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하는 마음 하나로 다 통했기 때문이다.
사장님으로부터 특별 서비스 안주까지 받은 엄마들은 기분이 한층 업됐고, 폭풍 수다를 떨었다.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 또는 조선족 이모님에게 애를 맡기며 생기는 고충, 미운 네 살 극복 방안 등 육아 관련 얘기부터 남편과의 신경전, 출산 후 변한 몸매에 대한 고민, 경단녀로서의 어려움, 내 집 마련에 대한 근심 걱정, 승진과 맞물린 둘째 출산 휴가 시점 정하는 일까지.
또 둘째 아이는 과연 낳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고민, 또 첫째 아이를 얼마나 어렵게 가졌는지 남에게 쉽게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 등 끝이 없었다.
중간 중간 "얼마 만의 자유인지 모르겠다"는 행복한 추임새가 곁들여진 수다는 자정이 돼서야 끝날 수 있었다.
사실 육아를 하는 엄마들의 스케줄은 내 것만이 아니다. 이날 불금 약속만 보더라도 며칠 전부터 남편에게 혹은 시어머니나 친정 어머니에게 '불금'을 선언하고 서로 시간 양해를 구해 어렵게 얻어낸 것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엄마들끼리의 만남 역시 오롯이 내 것이 아니다. 속내 깊은 이야기를 하려다보면 어느 새 지루해진 아이가 옆에서 가만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맘충'으로 낙인 찍히기 전 서둘러 나오다보면 그냥 집에서 마시는 커피 믹스 대신 테이크아웃 잔에 커피 한 잔 마셨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을 뿐이다.
그래서 더더욱 소중한 '여자 사람'들 끼리만의 만남. 결혼이나 출산 이후 거의 강제적으로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엄마들의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필요로 했던 만남이었는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 이전에 '나'라는 사람을 자유롭게 펼쳐 보일 수 있는 만남이 엄마들에게는 필요하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육아를 맡고 있을수록 말이다.
최근 17년만에 재결합해 무대에 선 HOT(역시 왕년의 인기 아이돌그룹) 공연장은 그야말로 '엄마'들의 향연이었다. 자신의 10대 시절, 우상이었던 '오빠'들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엄마들의 모습은, 다들 꿈많던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했고 무척 행복해 보였다.
설 연휴에 치러진 공연이었음에도 과감히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왔다는 한 엄마는 '오빠'들을 봤으니 돌아가면 시댁에도, 아이에게도 더 잘하겠노라고 말했다.
육아에 지쳐 어느 순간 잊고 지낸 '나'를 찾기 위해 주변 친구들과의 만남이든, 추억 속 음악이든 그 무엇이 됐든 시도해 볼 만 한 것 같다. 불금 이후 평소보다 부족한 수면에 시달렸지만 오히려 난 육아를 할 힘을 얻었다. 엄마의 행복이 곧 내 아이의 행복, 우리 가족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디지털뉴스국 방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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