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김주하의 3월 2일 뉴스초점-성폭행자 공개가 명예 훼손?
입력 2018-03-02 20:10  | 수정 2018-03-02 20:55
'나는 극단 누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나는 대학 어느 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SNS 등을 통해 가해자 신원을 공개하며 고발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글을 쓴 사람이 되려 명예 훼손으로 처벌을 받는다면 어떨까요. 성폭력이 실제 사실인데도 말이지요.

지난 2000년, 조교를 성추행해 유죄를 선고받은 한 대학교수가 조교를 도운 여성단체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인터넷과 인쇄물로 자신의 실명과 소속을 공개했다는 건데, 1·2심은 모두 명예훼손이 맞다고 인정했습니다. 다행히 대법원에선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그러기까지 5년이란 오랜 시간이 걸렸죠.
1·2심 재판부가 유죄로 본 건 '공개적으로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법 조항 때문이었습니다. 이 조항을 글자 그대로 따르면, 성폭력을 당한 사람이라도 가해자를 공개하면 그 내용이 사실이라도 그 사람에 대한 명예훼손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인정해 죄가 명백함에도 가해자가 누군지 SNS 등에 노출하면 거꾸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거죠.

물론 공익을 위한 거라면 처벌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디까지가 공익인지 기준이 없기에 결국 판사의 재량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 피해 사실을 폭로하고도 2차 피해가 두려워 오히려 숨거나 처벌을 취소하는 경우도 있는 거죠.


2012년 미국에선 강간죄로 유죄 선고를 받은 남자가 피해 여성을 명예훼손으로 역고소하자, 판사는 논할 가치조차 없다며 재판 시작 15분 만에 이를 기각해버렸습니다. 유엔 인권위원회도 이렇게 사실을 말해도 명예훼손이 되는 건 폐지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이런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폐지해 달라'는 동의가 계속 올라오고 있지만, 우리 법만은 여전히 꿈쩍도 하질 않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명예를 운운하는 뻔뻔한 이들, 수십 년이 지나도 고통을 잊지 못하는 성폭력 피해자들.

피해자가 최소한 누구한테 피해를 당했다고 공개할 수 있게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물론 법 조항 하나 바꾼다고 성폭력이 근절되진 않겠지만, 최소한 잘못하면 처벌은 물론 만천하에 공개돼 사회적으로도 매장될 수 있다는 걸 알게 한다면 함부로 범행을 저지르지는 못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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