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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돈 모아 사장계좌로…`눈먼 돈` 굴린 가상화폐 거래소
입력 2018-01-23 17:46  | 수정 2018-01-23 19:59
◆ 가상화폐 실명제 시행 / 영세 거래소 천태만상 ◆
소형 가상화폐 거래소인 A사는 5개 은행 계좌로 이용자의 자금을 모은 뒤 이 중 109억원을 A사 명의의 다른 은행 계좌로 송금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42억원은 다시 A사 대표자 명의 계좌로, 또 다른 33억원은 A사 사내이사 명의의 은행 계좌로 보냈다. 여러 개의 은행 계좌를 통해 가상화폐 거래소 임원 명의의 계좌에 돈을 입금한 뒤 다른 여러 개의 가상화폐 거래소 계좌로 이체한 사례도 있었다. 고객에게 "가상화폐를 사는 데 사용한다"며 받은 돈을 어느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관리한 셈이다.
금융당국이 23일 발표한 '가상통화 취급업소 현장조사 결과'에는 A사 사례를 포함해 이른바 잡(雜)코인을 중개하는 영세 거래소의 의심 거래 정황이 여럿 포함됐다. 주로 법인계좌에 개인 고객들의 돈을 구분 없이 모아 담는 일명 '벌집계좌'를 다른 목적에 사용한 것으로 의심되는 거래들이다. 금융위원회는 이 같은 계좌들이 사기, 유사수신행위와 조세 포탈, 다단계 판매 등에 악용됐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김용범 금융위 부위원장은 "처음에 점검을 나갈 때 20개 정도 법인계좌를 이용하고 있다는 취급 업소 명단을 가지고 갔는데 일주일 사이에 60여 개로 알고 있던 것의 3배가 적발됐다"며 "은행이 제대로 자체 점검하고 상시 점검을 나가서 보면 얼마나 많은 군소 취급업체가 나올지는 추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주로 잡코인이라는 게 이런 취급 업소를 통해 거래될 가능성이 많은데 이런 부분이 가장 취약하다"며 "각 은행은 심각한 평판 위험에 노출되는 셈이어서 당연히 (감시) 인력을 보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는 이처럼 개별 개인계좌를 만들지 않고 일반 법인계좌를 집금계좌로 하는 업체는 사기, 횡령, 유사수신 발생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법인계좌에서 거액 자금이 여타 거래소로 송금되는 경우 시세 조종 등 불공정거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법인과 거래소의 자금이 뒤섞일 수 있으며 자금세탁 관리도 어렵다.

또 다른 중소형 가상화폐 거래소 B사는 고객으로부터 받은 150억원 중 상당 부분을 해당 회사 대주주 계좌로 이체하거나 다른 은행 계좌로 이체한 사실이 적발됐다. 주식 거래는 투자자 예탁금을 따로 보관해야 하지만 가상화폐 거래대금은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C사는 은행으로부터 가상계좌를 발급받은 가상화폐 거래 계좌를 다른 가상화폐 거래소에 재판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가상 거래 계좌를 발급해주는 은행들의 느슨한 계좌 관리도 문제로 지적됐다. 일부 은행은 가상화폐 거래소임을 밝혔음에도 강화된 고객확인(EDD) 절차를 수행하지 않았고, 가상화폐 거래와 무관한 업종의 법인이 가상화폐 관련 금융거래를 위해 계좌를 개설했음에도 이를 식별하지 못했다.
일반계좌를 가상화폐 관련 금융거래의 집금계좌로 이용하고 있는 사례들은 대부분 이번 금융정보분석원(FIU) 점검 과정에서 적발된 사례로 은행에서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금융위 관계자는 "은행들은 학원으로 등록한 법인이 가상화폐 거래소를 빙자해 거래를 하고 있어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은행이 의무사항을 지키면 웬만한 영세업체들의 불법 행위도 많이 근절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에 따르면 현재까지 가상화폐와 관련된 주요 의심거래 보고 사례로 적발된 카테고리는 크게 '조세 포탈 및 관세법 위반' '사기, 유사수신행위' '사기, 다단계판매' 유형으로 구분된다.
전문가들은 가상화폐 취급 업자의 계좌에서 단기간에 수십억 원의 자금이 특정 개인 또는 특정 법인 명의 계좌로 이체된 후 현금 인출하는 경우는 마약 대금 등 불법자금의 국내 반입, 수출대금 과소 신고 후 가상화폐로 대금을 지급하는 조세 포탈 및 관세법 위반 등이 의심된다고 입을 모았다. 정상적인 투자 행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가상화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을 상대로 수익률 등에 대한 정보를 기망하는 사기, 유사수신행위도 주의할 대목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최근 가상화폐 채굴기 투자 명목 등으로 사기행각을 벌여 적발된 사례는 사기, 다단계 판매 등이 의심된다"며 "가상화폐 투자를 대행해준다며 돈을 모아 제대로 된 수익을 돌려주지 않거나 돈을 들고 도망친 사례도 보고되고 있어 투자자들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진화 한국블록체인협회 준비위 대표는 "가상화폐 거래대금도 주식거래 대금처럼 분리된 계좌에 따로 보관하도록 의무화하고 투자대행 등 행위를 엄격히 제한하는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승윤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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