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30대 여성·지하철·평지…롱런하는 골목상권 3대 조건
입력 2017-10-02 17:02  | 수정 2017-10-02 19:33
지난달 24일 오후에 찾은 경리단길 카페는 한산했다. 몇 달 전 주말에 문을 열었던 한 카페는 아예 주말 영업을 하지 않았다. 카페 앞에서 사진을 찍는 젊은 사람들은 실제 카페 안으로 들어와 음료를 구매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인근 화장품 가게와 액세서리 가게 등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피크타임인 주말 오후, 2시간 동안 가게로 들어가는 손님은 5명이 채 안 됐다. 경리단길 안쪽 골목에는 빈 가게가 눈으로 봐도 꽤 보였다. 인근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은 "최근 들어 경리단길 몇몇 가게가 버티지 못하고 나가 공실 상태"라며 "몇몇 유명 맛집을 제외하곤 임대료 맞추기도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경리단길의 인기가 시들하다. 건물 가격은 크게 오르는 추세인데, 임대료 수입은 정체 상태다. 임대수익률이 정기예금 금리 수준에 그치고 있다. 외국계 부동산회사인 JLL의 김명식 이사는 "5년 전과 비교하면 경리단길 신축 건물의 임대료는 대부분 50% 이상 올랐지만 기존 건물은 임차인들이 직접 매장을 개조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거의 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대료가 제자리인 가운데 건물 가격만 오르다 보니 3년 전 4% 수준이었던 임대수익률이 어느새 은행 이자와 비슷한 2% 수준으로 추락했다. 적어도 4~5%의 임대수익률을 기대하고 건물 투자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투자수익률 측면에서 '낙제'에 해당한다. 무리해 매입한 투자자는 대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급매물을 내놓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경리단길은 특색 있는 맛집과 가게들이 많이 생기며 부흥하는 골목상권의 대표 주자로 이름을 알렸다. 남산을 낀 독특한 분위기도 한몫했다. 그러나 올 들어 상황이 심상치 않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경리단길은 남산을 끼고 있는 곳으로, 대중교통이 다른 골목상권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곳"이라면서 "녹사평역이 있다고 하지만 역세권으로 보기 어렵다. 지나가다 자연스럽게 들르는 곳이 아니라 지도를 보며 굉장히 어렵게 찾아와야 하는 상권이란 약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배후수요가 없다는 점도 몇 년 새 상권의 쇠퇴를 불러왔다. 가로수길만 해도 '사드'로 중국인 관광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신사역 인근 오피스거리의 직장인과 1만여 가구에 달하는 압구정 일대의 구매력 있는 주민들이 든든한 배후수요다. 인근 성형외과에서 시술하는 부유한 여성들이 쇼핑을 하는데, 이들의 구매력도 작지 않다. 이태원 거리도 외국인이 거주하는 고급 주택이 근방에 있다 보니 이들이 이태원 거리에서 적지 않은 돈을 아끼지 않고 쓴다.
광화문은 더하다. 인근에 서울시청은 물론 수많은 회사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모두 상당한 구매력이 있는 상권의 수요자들이다. 상권 부침이 가장 없는 곳이 광화문인 이유다. 광화문과 종로가 지하철1·2·3·5호선 등 다양한 지하철 노선과 연결돼 있고, 광역버스 정류장이 있다는 점도 플러스 요인이다. 그동안 주말에 썰렁했던 약점은 최근 디타워와 그랑서울 등 상권이 새롭게 생기면서 많이 극복됐다.
하지만 경리단길은 이 같은 효과를 누릴 만한 배후 주거지역이 거의 없다. 골목이 좁고 경사진 데다 대중교통이 불편하고 주차가 어렵다 보니 구매력이 큰 사람들은 점점 멀어지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학생이나 20대 젊은 여성만 몰린다. 이러다 보니 손님이 모이더라도 객단가가 낮다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다.
결국 지속 가능한 상권은 지하철 등 대중교통과 연결이 되는지, 넓은 면적의 평지에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는지, 구매력 있는 30대 여성이 수요층으로 확보돼 있는지가 가른다는 것이 업계의 진단이다. 실제로 경리단길은 경기나 기타 변수에 따라 크게 흔들리지 않고 꾸준한 모습을 보이는 광화문·명동 등 강북상권, 강남역·가로수길 등 강남상권과 대조된다. 이들 상권은 2호선과 3호선 등 핵심 지하철역을 끼고 있고, 30대 여성의 선호도가 높아 구매력이 높은 편이다. 평평한 지역에 넓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샤로수길'로 알려진 서울대역과 낙성대역 사이 관악로14길도 30대 여성, 평지, 교통 등 3박자를 모두 갖춘 곳으로 꼽힌다. 아직 전통시장 느낌이 일부 남아 있지만 점차 특색 있는 상점이 들어서고 있다. 정은상 NAI프라퍼트리 리서치센터장은 "지방에서 상경해 강남에서 막 직장을 얻은 젊은 층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 바로 샤로수길 인근"이라며 "지하철 2호선을 타면 강남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고 평지인 데다 여성 비중이 커 이들을 타깃으로 하는 상점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북촌'으로 알려진 서울 필운동 상권도 배화여대가 가까워 젊은 여성 비중이 높고 3호선 경복궁역을 이용하기 편리하며 평지여서 10년 가까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NAI프라퍼트리에 따르면 이 지역 상가 매매가격은 2006년 3.3㎡당 999만원에서 올해 4300만원으로 4배 넘게 상승했다.
골목 상권 3요소를 모두 갖춘 지역은 개인 자산가뿐만 아니라 기관투자가의 러브콜도 받고 있다.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은 국내 유일의 '준명품 거리'라는 특색이 더해짐에 따라 자산운용사들이 건물을 계속해서 사들이고 있다. 이지스자산운용은 최근 가로수길 꼬마빌딩을 1개 매입했고, 또 다른 건물도 매입하기 위해 인수의향서를 제출한 상태다. 미국 사모펀드 운용사 안젤로고든도 올 초 가로수길 꼬마빌딩을 매수했다.
[박인혜 기자 / 용환진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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