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작가(69)의 소설 '남한산성'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인조의 초라한 뒷모습이 아른거리는 이 처연한 문장은 '칼의 노래'의 처음을 상기시킨다. 그가 수도 없이 고쳐 썼다는, 예의 그 유명한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생과 사의 절박한 기로에서, 그는 버려진 곳을, 버려야만 하는 곳을, 그 아픈 폐허를 자주 응시해왔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새싹을, 실낱 같은 희망의 기운을 한데 바라보려 했다. 그의 소설이 일종의 주술처럼 독자의 마음을 처음부터 사로잡는 건, 그래서일 게다. 그럼, 소설에 바탕한 영화 '남한산성'(10월 3일 개봉)은 어떠할까. '수상한 그녀' '도가니'의 황동혁 감독(46)은 원작의 문장 하나하나, 장면 하나하나를 충실히 영상으로 옮겨놓은 듯한 기색이다. 그러면서도 소설의 명성을 배반하지 않는 선에서 일말의 새로움을 가미하려 한 흔적이 엿보인다. 지난 27일 밤 9시를 넘긴 시간,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김훈 작가·황동혁 감독과의 '남한산성' 대담이 열렸다.
―영화를 본 소감이 어떤가.
▷김훈: 뜨겁고 격정적인 것을 냉엄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첫 장면에서 김상헌(김윤석)이 사공을 죽인다. 카메라가 멀리 뒤로 빠지면서 얼어붙은 겨울 산하를 보여준다. 그 죽고 죽임이 조국의 산하 속에서 벌어지는 비극이라는 것을 아주 냉엄하게 보여준다. 그 냉엄한 표현으로 어떤 거대한 의미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청나라 기마병이 지평선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장면. 조선 선비 최명길(이병헌)이 그 앞에 홀로 나간다. 조선 선비의 갓이 보이고, 갓의 무늬가 보이고, 그 무늬 안에 멀리 청나라 기병대가 펼쳐져 있다. 한 마디 대사 없이 나오는 이 장면 역시 냉엄한 무언가를 보여줬다.
▷황동혁: 소설을 읽을 때 말씀하신 장면에서부터 깊이 빠져들었다. 김상헌이라는 인물을 극적으로 설명해주는 오프닝이었다. 이후 그가 사공을 죽인 원죄를 어떻게 지고 살아가는 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소설처럼 아주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으로 이 한겨울 조선의 강가라는 공간을 오롯이 보여주려 했다. 사공의 두려움과 베기 직전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상상하게 만들면서. 최명길의 등장은 소설에 없던 장면이었다. 그의 뒤를 먼저 보여주고, 신기루처럼 창의 선봉대가 다가오고, 이를 카메라가 들이댈 때 그의 갓에 물결 무늬가 일렁이면서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의도치 않은 효과가 나왔다.
―소설을 어떻게 영화화하게 됐나.
▷황동혁: 처음 원작을 사서 읽었을 때, 너무나도 치열하고 처절하고, 한편으로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 때문이었을까. 배우들 입을 통해 옮겨보고 싶었고, 47일간 산성의 안과 밖, 얼음과 눈으로 덮인 풍경, 그 처연함과 비애미, 비장미 같은 것들을 영상에 담아 보고 싶었다.
―소설의 정수를 잘 담아냈다고 보나.
▷김훈: 내가 소설로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를 잘 표현해냈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에 관한 이야기다. 그 '악'에 짓밟히면서도 저항하고, 순응하고, 앞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난과 슬픔을 묘사하려 했다. 영화에서도 이 의도가 잘 살아나 있다. 마지막에 임금이 투항하고, 대궐로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카메라는 멀리 뒤로 빠지고 그 텅비고 거대한 대궐을 향해 인조가 초라한 모습으로 걸어간다. 47일 간 비워놓은 황량한 대궐의 풍경을 배경으로 아무런 대사도 없이. 인조는 그 대궐에서 다시 미래를 설계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소설에 없는 대목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어린 나루에게 날쇠(고수)가 대장간 일을 하면서 아름답고 위대한 대사를 던진다. "너무 멀리 가지 마라."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못 썼다. 깜작 놀랐다. 김상헌과 최명길의 그 목숨 건 치열하고도 거대한 논쟁보다 훨씬 아름답고 투박하고 생활적이다. 이 단순한 언어 안에 인간의 희망과 사랑과 미래가 들어 있다고 봤다.
―마지막으로, 배우들 섭외 배경이 궁금하다.
▷황동혁: 김윤식과 이병헌, 어느 한 사람의 치우침도 없게 대사 수까지 헤아려 시나리오를 썼다. 어느 하나 우위에 서지 않음을 물리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두 분에게 시나리오를 동시에 드렸고, 동시에 만나 뵈었고, 동시에 거절당했다. 한 번 더 고쳐 보여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에는 다행히 두 분 다 만족해 하셨다. 다음은 박해일씨였다. 인조의 좋지 않은 이미지에 대해 부담감이 처음엔 있어 보였다. 세 번을 거절당했지만 굽히지 않았다. 어렵게 만나 저녁 6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 연희동에서 한남동까지 단 둘이 술을 마셨다. 영화 얘기는 일절 배제하고 살아왔던 얘기만 했다. 며칠 뒤 전화가 오더라, 하겠노라고. 그날 연출자로서 내게 어떤 믿음을 발견해주신 것 같다.(웃음)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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