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키릴 페트렌코(45)가 이끄는 독일 바이에른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바이에른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의 13일 첫 내한공연은 시작 전부터 국내 클래식 팬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내년을 끝으로 임기를 마치는 사이먼 래틀의 뒤를 이어 '세계 최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차기 음악감독 자리에 오르는 페트렌코의 한국 데뷔 무대였다. 그는 언론 접촉을 극도로 꺼려 생전 진행한 인터뷰 자체가 거의 없는데다 음악을 대할 때 외에는 지독히 내성적이며 다소 자폐적 성향까지 지닌 것으로 알려진, 오늘날 클래식계에 몇 없는 신비주의적 존재다. 콧대 높은 베를린필 단원들의 지지를 얻은 비결을 알기 위해선 공연장으로 향하는 수밖에. 이날 저녁 2500석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R석이 30만원에 달했음에도 84%의 객석점유율을 기록했다.
베일을 벗은 페트렌코는 말 그대로 '완벽'했다. 검은 로만칼라 수트 차림으로 마침내 등장한 그는 인간이 뽑아낼 수 있는 집중력과 치밀함의 최대치를 모조리 음악에 쏟아붓는 타입의 지휘자였다. 이날 연주곡은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가 협연한 1부의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와 2부의 말러 교향곡 5번. 특유의 파격과 격정으로 마니아가 많은 말러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동시에 복잡하고 정교한 만듦새로 유명한 교향곡 5번은 페트렌코의 지극히 세밀하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체험하기 적격이었다.
키릴 페트렌코와 바이에른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
황장원 음악칼럼니스트는 "이제껏 본 공연 중 작곡가가 악보에 남긴 지시에 이처럼 완벽히 순종하는 지휘자는 처음이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꼼꼼하기로 악명 높은 말러의 음표 하나하나를 쉴 새 없이 온 몸으로 표현하는 모습은 복잡한 안무를 소화하는 발레 무용수를 연상시켰다.일류 오케스트라가 100% 따라오기 버거울 만큼 치밀한 그의 음악은 지독한 리허설의 결과물이었다. 이날 공연 전 리허설을 참관한 박제성 음악칼럼니스트는 "자신이 생각한 디테일이 완벽히 구현될 때까지 무수히 음악을 끊고 '따발총처럼' 지시를 쏟아내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20년 가까운 오페라 지휘 경력이 더해져 말러가 의도한 극적인 음악이 정확히 구현됐다"고 전했다.
마지막 악장이 끝난 뒤 객석의 흥분어린 환호로 커튼콜이 이어졌다. 세번째 커튼콜에 불려나온 페트렌코는 악장에게 '다같이 일어나자'는 신호를 보냈지만 단원들은 이를 무시하고 자리에 앉아 발을 굴렀다. 공연의 성공을 오롯이 지휘자의 공으로 돌리는 경의의 표시였다. 황 칼럼니스트는 "단원들로선 악보를 모조리 꿰고 자신들에게 일일이 세밀한 지시를 내리는 친절한 지휘자 페트렌코를 싫어할 도리가 없다"며 "베를린필의 선택에도 이같은 배경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으로 베를린필 연주영상을 중계하고 차세대 연주자 양성, 현대음악 레퍼토리 개발에 힘 쓰는 등 대중성과 혁신을 추구한 전임자 사이먼 래틀과는 사뭇 다르지만 못잖게 긍정적인 리더십을 선보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 칼럼니스트는 "대중과의 스킨십은 줄겠지만 카라얀 시대의 진지하고 치열한 음악 전통이 부활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운이 좋다면 페트렌코가 이끄는 베를린필의 공연을 서울에서 가까운 미래에 만나볼 수 있을 전망이다. 이번 내한공연을 주최한 공연기획사 빈체로 관계자는 "페트렌코의 베를린필 2021년 내한 공연을 현재 악단 측과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오신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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