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최은영의 다락방] 가까운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입력 2017-08-25 10:13 

김숨의 소설 '이혼'('문학동네' 2017년 봄호)에는 여러 종류의 결혼생활이 나온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십삼 년 간 결혼생활을 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사별한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 출신의 아내를 무시하며 그녀가 자신에게 부족한 배우자라는 사실을 평생 세뇌시킨다. 가장이라는 '권위'로 그는 아내와 자식에게 폭언과 폭행을 평생 지속한다. 아내의 입에서 '제 잘못이에요'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그녀'의 어머니는 결혼생활 내내 이혼을 꿈꾸고 몇 번이나 탈출하지만 끝내 이혼하지 못한다. 결혼생활이 사십 년 지속된 후, 스스로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사십 년 동안의 지속적인 학대는 그녀에게서 '학대가 아닌 삶'에 대한 상상력까지 박탈해간 것이다.
목사 커플은 이들 커플과 유사하다. 목사는 '사모의 품위'를 운운하며 아내를 폭행한다. 아내가 유방암에 걸리자 목사는 믿음과 기도가 부족해서 벌을 받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혼하지 못한다. 목사 남편과의 이혼이 "모태에서부터 믿은 신과의 이혼이기도 해서." 믿음과 기도가 부족해서 암에 걸렸다는 목사 남편의 비난은 그녀를 고통스럽게 한다.
반면 어그러진 결혼의 현실을 부정하며 사는 경우도 있다. 사진작가 최의 아내는 끝없이 외도하는 남편을 두고도 "남편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생각하면 너그러워져요"라고 자신의 남편을 이해해야지 어쩌겠느냐고 체념한다. 최의 아내를 만나고 온 날 '그녀'의 남편 철식은 "형수님을 좀 봐"라고 자신을 백퍼센트 수용하지 않는 '그녀'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그녀'는 시인이고, 철식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다. 철식은 부당해고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얼굴을 담는 작업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는 그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면서도 유방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는 자기 아내의 고통에는 무심하다. 호르몬제 복용으로 불면에 시달리는 그녀의 곁에 있는 대신 그는 남쪽 지방에 내려가 몇 달씩 작업을 계속한다. 그녀는 그녀가 아이를 유산했을 때도, 이사 갈 집을 알아보러 다닐 때도, 불임 상담을 받기로 예약되어 있었던 날에도, 모든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곁에 남편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그토록 관심을 두는 그가 어째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의 고통에 어떻게 그렇게 무감각할 수 있는지" 그녀는 묻고 싶어진다. 이혼 의사를 밝힌 그녀에게 그는 그녀가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짓을 한다며 비난한다. 이 소설에서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녀에게 사과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과 멀리 떨어진 존재의 고통에 감응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높은 수준의 공감능력을 갖춘 것일까. 그러나 멀리 떨어진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건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인정하고 공감하는 일이 그보다 어렵지 않을까. 가장 가까운 사람의 고통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그 고통을 보려면 자기 자신이 상대방의 고통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대상을 향해 책임을 묻는 것은 쉽지만, 자기 자신의 책임을 묻는 일은 어렵다. 특히 자기 자신이 상처받은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그러할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라는 반발심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때 상대에 대한 공감은 나르시시즘적인 자아상을 파괴하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호하는 것과 가까운 사람에 대한 공감은 공존할 수 없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서서 투쟁하는 남성들이 자신의 아내나 아이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처럼. 최소한의 정의는 나르시시즘의 거울을 깨고,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들여다보려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최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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