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현지시각) 저녁 필리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환영 만찬에 등장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밝게 웃고 있었으나 쓸쓸한 저녁을 보냈다. 이날 저녁 남북을 포함해 6자회담 당사국 외교장관 등 30여명의 각국 외교수장이 참석해 건배를 나눴지만 리용호와 잔을 부딪치고 싶은 장관은 별로 없었다. 잔을 든 리 외무상이 머쓱하게 두리번거리자 옆에 있던 스위스 외교 장관이 건배를 해주었을 뿐 의례적인 대화도 없었다.
강경화 장관은 이날 만찬장에 6번째로 리 외무상은 23번째 순서로 입장했다. 두 사람은 대기실에서 약 3분간 대화를 나눴다. 회담장에서 조우하기엔 먼 위치였다. 만찬장 내 리 외무상 바로 옆자리는 중국 왕이 외교 부장이었으나 작년과 마찬 가지로 회담 직전 배치가 바뀌었다. 왕이 부장은 6일 북중 양자회담을 가지며 "북중은 가까운 이웃이다"고 친밀감을 과시했다. 하지만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진 않았다.
북한의 우방국이 포진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도 이제 북한에 등을 돌리는 모습이었다. 작년 ARF에선 리 외무상은 의장국인 라오스 대통령·총리와 연쇄 회동을 가지며 '외교전'을 펼쳤지만 올해 아세안 국가와의 접촉은 최소화될 전망이다. 이번 회의에 의장국인 필리핀이 아세안을 대표해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우려'를 표시할 가능성이 높다.
외교 소식통은 "올해 초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한 김정남 피살사건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고 했다. 북한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20대 여성을 이용해 김정남을 말레이시아에서 살해했다. 피살 사건에 아세안 주요 국가 3곳을 모두 연루시킨 것이다. 다만 ARF기간 김정남 피살이 공개적으로 언급되진 않았는데 이 소식통은 "김정남 피살은 말레이시아에게 좋지 않은 기억이다. 아세안이 이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런 북한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건 캄보디아였다. 아세안은 5일 별도의 한반도 성명을 발표하며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우려를 표했는데 캄보디아가 반대했다고 한다. 북한에 대한 아세안의 입장이 지나치게 강경화되는 것 아니냐는 불만 때문이다. 캄보디아는 북한의 몇 안되는 우방국이다. 리 외무상의 소소한 외교적 성과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캄보디아의 외교장관도 6일 저녁 만찬장에서 리 외무상과 잔을 부딪치진 않았다. 캄보디아 외교 장관은 스위스 외교장관과 마찬가지로 리 외무상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으나 그를 외면했다.
[마닐라 = 박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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