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계는 지금 `국뽕`과 `신파` 벗은 역사물 각광
입력 2017-08-02 15:52  | 수정 2017-08-02 17:00

"난 일본 권력에 반감이 있지만 민중에겐 오히려 친밀감이 들지."
영화 '박열'의 주인공 독립운동가 박열은 기존의 영화들과 사뭇 다른 관점에서 일본을 본다. 하나의 '악의 덩어리'로만 여겨졌던 일본을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쪼개어 인식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인 박열의 적은 '일본'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고 핍박받는 일본 민중은 오히려 그의 동지다. 이와 함께 영화는 그의 연인이자 사상적 동지인 후미코와 후네 등 양심적인 일본인들을 비중 있게 다룬다.
연극 '1945'는 해방 직후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만주 전재민 구제소에 모여 기차를 타고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조선인들의 이야기다. 연극 말미 조선 사람들은 명숙에게 일본인인 미즈코를 기차에 태울 수 없다며 버리고 갈 것을 요구한다. 명숙은 결코 그녀를 버리지 않겠다고 답한다. 조선인과 일본인, 철전지 원수 같은 사이지만 미워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서로의 고통을 나누길 택한다.
'미생'과 '이끼'의 작가 윤태호의 재연재되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은 광복과 함께 시작된다. 친일파들은 곧바로 독립운동가로 돌변해 임시정부에 앞 다투어 자금을 지원한다. 몇몇 조선인들은 혼란을 틈타 일본인을 죽여 금괴를 약탈한다. 흑과 백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욕망을 낱낱이 그려낸 작품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를 새롭게 조명하는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근현대역사물은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국뽕' 혹은 '신파'로 폄하되며 젊은 세대들에게 외면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작품들은 '일본인은 나쁘고 조선인은 착하다'는 고루한 국가주의적 흑백논리를 벗어버리고 그 아래 묻혀있던 신선한 소재들을 끄집어내며 호평 받고 있다. 영화 '박열'은 저예산 영화임에도 250만 명의 관객을 모았고 영화 '군함도'는 500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다. 지난 30일 막 폐막한 연극 '1945'는 신작임에도 불구하고 입소문을 타고 23회 중 폐막 무렵 10회가 전석 매진됐다. 웹툰 '인천상륙작전'과 '곱게자란자식'은 모두 평균 평점 9.9점을 기록했다. 모두 일제강점기시기를 일제와의 대결구도로만 다루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실제 삶의 풍경을 세밀하게 들여다본 작품들이다.
이 외에도 일제 강점기 대규모 조선인 강제 징용을 다룬 영화 '군함도', 일제강점기 파란의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사랑과 애환을 그린 조정래의 동명소설을 감골댁 가족 중심으로 재구성한 뮤지컬 '아리랑', 한반도의 가난한 14살 시골 소녀가 위안부가 되기까지의 사연을 풀어 낸 웹툰 '곱게자란자식', 가난하게 살아가는 독립운동가 후손이 기득권에게 통쾌하게 반격하는 드라마 '도둑놈 도둑님'까지 장르불문 근현대사 열풍이다.
김연수 문화평론가는 "근현대사는 격동의 시기로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지만 그 시대를 실제로 살아냈던 이해당사자들이 많아 교과서에서도 많이 다루지 않을 정도로 예민한 소재였다"며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어느 정도 역사적 거리감이 생기면서 객관적으로 혹은 전혀 새롭게 보려는 시도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반공이나 애국과 같은 낡은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세대들이 역사를 다르게 볼 여유가 생긴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 감독은 부임 초부터 '근현대희곡의 재발견' 시리즈를 통해 근현대의 작품과 시대상을 조명하는데 힘써왔다. 그는 연극 '1945'의 흥행 이유를 '공감'에서 찾았다. 김 감독은 "근현대사는 무너졌던 공동체를 세우고 끊어졌던 역사를 다시 이어야한다는 '욕망'과 '열정'이 넘치던 시기였다. 이는 오늘날 풍요 속 빈곤을 느끼는 관객들에게 가장 부족한 감정들이기 때문에 거꾸로 깊이 갈구하고 공감하는 게 아닐까 싶다"고 설명했다. 이어 "근현대사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시기"라며 "예술가들이 본능적으로 채워내고자 이끌리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근현대사를 다룰 때는 신중해야한다고 조언한다. 영화 '군함도'는 역사 왜곡, 한·일 외교 갈등 등 첨예한 이슈에 중심에 서게 됐다. 또한 당시 일제의 폭압을 밀도 있게 그려내기보다 조선인끼리의 다툼, 조선인 친일파 캐릭터 등을 강조한 점에 대해서는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역사를 다루는 영화는 허구이면서 동시에 현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근현대는 예민한 문제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고증을 더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준익 감독도 '박열' 촬영 후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해서 영화를 찍을 때 어려운 점은 고증에 따른 사실 증빙의 확보다. 더구나 실존 인물을 다룰 때에는 후손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어렵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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