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이상철 기자] 2017년 여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이적시장의 화두는 웨인 루니의 에버턴행이다. 로멜루 루카쿠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이적과 맞물려 성사된 13년 만에 귀향이다.
‘맨유의 전설이 된 루니는 여전히 파란색보다 빨간색 유니폼이 더 친숙하다. 그러나 앞으로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보기 어렵다. 에버턴의 유니폼 색상에 빨간색은 없다.
2004년 루니는 이적을 강하게 요구했다. 에버턴의 만류에도 떠났다. 하지만 에버턴 복귀 또한 루니의 강한 의지에 비롯됐다. 그의 머리와 가슴 속에 에버턴 외 선택지는 없었다. 아들과 에버턴 파자마를 입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고백한 루니는 이제 에버턴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루니가 맨유에서 꽃을 피웠지만 그 씨앗은 에버턴에 있다. 리버풀 출신으로 에버턴 유스를 거쳐 2002년 8월 성인 무대 데뷔까지 치렀다. 에버턴은 루니에게 뗄 수 없는 팀이다.
에버턴을 떠났을 때와는 다르다. 루니는 더 이상 축구종가에서 가장 촉망 받는 유망주가 아니다. ‘지는 해에 가깝다.
해를 거듭할수록 폼이 떨어지고 있다. ‘왕년의 루니가 아니다. 출전시간도 줄었다. 2016-17시즌 프리미어리그 출전시간은 1539분에 그쳤다. 25경기 중 선발 출전은 15경기뿐이다. 그 전까지 루니의 교체 출전은 1시즌에 1,2번 볼 정도의 진귀한 풍경이었다.
루니의 에버턴행 배경이 선수로서 ‘말년을 보내기 위함은 아니다. ‘경기에 뛰고 싶은 루니는 에버턴에서 부활을 꿈꾸고 있다. 에버턴도 전력 강화 차원의 영입이다.
루니처럼 슈퍼스타로 화려하게 빛난 뒤 친정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은 아름다운 재회와 재기, 나아가 작별까지 그린다.
루니가 바라는 것은 명예회복이다. 루니는 에버턴을 정상으로 이끌고 싶다고 밝혔다. 에버턴은 1994-95시즌 FA컵 우승을 끝으로 트로피를 들지 못했다. 10대 루니가 하지 못한 것을 30대 루니가 해내려고 한다.
루니는 맨유 시절 프리미어리그, FA컵, 리그컵,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유로파리그,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 등 수많은 우승을 경험했다. 에버턴은 루니의 경험과 위닝 멘탈리티에 기대를 걸고 있다.
루니는 보비 찰튼(49골)을 넘어 53골로 삼사자군단 최다 득점자이기도 하다. A매치 최다 출전 신기록까지도 7경기만 남겨뒀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스코틀랜드와 2018 러시아월드컵 예선을 끝으로 잉글랜드 대표팀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그가 돌아갈 곳은 에버턴만이 아니다.
루니에겐 좋은 본보기가 있다. 무결점 스트라이커로 불렸던 안드리 세브첸코는 친정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2006년 첼시 이적 후 내리막길을 걷던 세브첸코는 2009년 씁쓸하게 ‘친정 디나모 키예프로 돌아갔다. 빅리그로 떠난 뒤 10년 만이다.
세브첸코는 디나모 키예프에서 3시즌을 뛰며 공식 대회 30골을 터뜨렸다. 샤흐타르의 독주 체제를 깨트리지 못했으나 디나모 키예프는 2011년 슈퍼컵 우승을 차지했다. 꾸준한 활약을 바탕으로 우크라이나 대표팀에서 활동한 세브첸코는 2012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우크라이나에 유로 본선 첫 승의 선물을 남긴 채.
친정 복귀 후 우승트로피를 안긴 대표적인 선수는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이다. 잦은 은퇴 번복으로 이슈를 만들고 있지만 그의 실력은 변함이 없다.
에스투디안테스에서 성장한 베론은 유럽 생활을 청산하고 2006년 다시 유니폼을 입었다. 반년 만에 아르헨티나 아페르투라(전기리그) 우승을 이끌더니 2009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에스투디안테스를 남미 최강팀으로 만들었다.
에스투디안테스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은 39년 만이었다. 그 해 FIFA 클럽월드컵 결승까지 올라 우승을 눈앞에 뒀으나 바르셀로나의 뒷심에 눌렸다. 베론은 에스투디안테스에서 활약에 힘입어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부름을 다시 받았으며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까지 경험했다.
뉴웰스 올드 보이스 유스 출신 막시 로드리게스도 에스파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이하 AT마드리드), 리버풀을 거쳐 2012년부터 친정에서 뛰고 있다. 아직도 현역이다.
2012-13시즌 클라우수라(후기리그) 우승에 이바지한 그는 2014 브라질월드컵에도 참가했다. 그의 3번째 월드컵. 그리고 준결승 네덜란드전 승부차기에서 4번째 키커로 나가 승리를 확정 짓는 슛을 성공시켰다.
루니는 에버턴과 2년 계약했다. 연봉도 50%를 삭감했다. 에버턴에 대한 애정을 고려하면, 프로 데뷔를 한 팀에서 마지막을 장식할 가능성도 있다.
프로 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곳에서 마무리를 짓는 경우는 꽤 많다. 은퇴 수순이다. 리버 플라테에서 화려하게 데뷔해 U-20 월드컵을 통해 축구팬에 강한 인상을 남겼던 파블로 아이마르와 하비에르 사비올라는 거액을 받고 유럽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택한 팀은 리버 플라테였다. 친정 품에 돌아왔다는 상징성이 컸다. 둘 다 딱 1시즌 만에 은퇴했다.
‘느림의 미학 후안 로만 리켈메는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던 유스팀에 돌아와 작별인사를 했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와 보카 주니어스 유스를 거쳤던 리켈메는 2007년 유럽 생활을 마친 뒤 아르헨티나에서 이 2개 팀 유니폼만 입었다. 그리고 2014년 7월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로 돌아간 후 6개월 만에 유니폼을 벗었다.
2009-10시즌 인터밀란의 ‘트레블 주역인 디에고 밀리토도 빼놓을 수 없다. 인터 밀란에서 5시즌을 뛴 밀리토는 전성기를 누렸다. 월드컵(2010)과 코파 아메리카(2011)에 참가했다. 그러나 밀리토 역시 세월 앞에 장사가 될 수 없었다. 2014년 프로선수로 발을 내딛은 라싱 클럽으로 돌아갔다. 3시즌 동안 21골을 넣은 그는 37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유럽도 다르지 않다. 그 가운데 맨유와 인연이 있는 헨릭 라르손과 에드윈 반 데 사르는 조금 특별한 경우다.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축구화를 벗었지만 친정의 긴급 러브콜에 응했다.
라르손은 헬싱보리 태생으로 고향 팀에서 오랫동안 뛰었다. 2009년 은퇴를 한 뒤 감독까지 역임했다. 하지만 그가 1988년 프로 데뷔를 한 팀은 회가보리였다. 그리고 2013년 회가보리의 코치로 활동할 당시 부상자가 속출하자 직접 선수로 뛰기도 했다.
반 데 사르도 비슷한 경우다. 2011년 맨유에서 은퇴한 그는 아약스에서 행정가로 변신했다. 아약스는 반 데 사르가 프로에 입문한 팀이다.
축구공보다 펜을 더 많이 잡게 된 반 데 사르는 2016년 다시 한 번 골키퍼 장갑을 끼었다. 유스팀으로 뛰었던 노르트베이크가 골키퍼 부상으로 1경기만 부탁했고, 반 데 사르는 흔쾌히 수락했다. 5년 만에 실전이었지만 경기 결과는 1-1 무승부였다. 결과적으로 라르손과 반 데 사르의 ‘현역 마지막 경기는 친정에서 갖게 된 셈이었다.
험난한 여정 끝에 친정으로 돌아와 재기한 뒤 끝까지 달려가려는 선수도 있다. AT마드리드의 페르난도 토레스는 최근 1년 재계약을 했다.
루카쿠가 깨기 전까지 리버풀에서 첼시로 옮긴 토레스의 이적료는 프리미어리그 팀간 거래 최고액이었다. 그러나 첼시 이적 후 토레스는 추락했다. 돌고 돌아 2014년 말 AT마드리드로 돌아갔다.
‘한물갔다는 혹평을 받았던 토레스는 다시 일어섰다. 임대 후 완전 이적한 토레스는 2016-17시즌에도 공식 대회 10골을 넣었다.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 지도 아래 활용가치도 컸다. 경쟁력을 갖추고 팬의 지지도 높은 토레스는 AT마드리드에 대한 충성심도 강하다.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복귀 후 4번째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rok1954@maekyung.com][ⓒ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맨유의 전설이 된 루니는 여전히 파란색보다 빨간색 유니폼이 더 친숙하다. 그러나 앞으로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보기 어렵다. 에버턴의 유니폼 색상에 빨간색은 없다.
2004년 루니는 이적을 강하게 요구했다. 에버턴의 만류에도 떠났다. 하지만 에버턴 복귀 또한 루니의 강한 의지에 비롯됐다. 그의 머리와 가슴 속에 에버턴 외 선택지는 없었다. 아들과 에버턴 파자마를 입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고백한 루니는 이제 에버턴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루니가 맨유에서 꽃을 피웠지만 그 씨앗은 에버턴에 있다. 리버풀 출신으로 에버턴 유스를 거쳐 2002년 8월 성인 무대 데뷔까지 치렀다. 에버턴은 루니에게 뗄 수 없는 팀이다.
에버턴을 떠났을 때와는 다르다. 루니는 더 이상 축구종가에서 가장 촉망 받는 유망주가 아니다. ‘지는 해에 가깝다.
해를 거듭할수록 폼이 떨어지고 있다. ‘왕년의 루니가 아니다. 출전시간도 줄었다. 2016-17시즌 프리미어리그 출전시간은 1539분에 그쳤다. 25경기 중 선발 출전은 15경기뿐이다. 그 전까지 루니의 교체 출전은 1시즌에 1,2번 볼 정도의 진귀한 풍경이었다.
루니의 에버턴행 배경이 선수로서 ‘말년을 보내기 위함은 아니다. ‘경기에 뛰고 싶은 루니는 에버턴에서 부활을 꿈꾸고 있다. 에버턴도 전력 강화 차원의 영입이다.
루니처럼 슈퍼스타로 화려하게 빛난 뒤 친정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은 아름다운 재회와 재기, 나아가 작별까지 그린다.
안드리 세브첸코는 디나모 키예프로 돌아가 명예를 회복했다. 2012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조별리그 스웨덴전에서는 2골을 넣으며 본선 첫 승을 이끌었다. 사진=ⓒAFPBBNews = News1
◆우승부터 국가대표까지루니가 바라는 것은 명예회복이다. 루니는 에버턴을 정상으로 이끌고 싶다고 밝혔다. 에버턴은 1994-95시즌 FA컵 우승을 끝으로 트로피를 들지 못했다. 10대 루니가 하지 못한 것을 30대 루니가 해내려고 한다.
루니는 맨유 시절 프리미어리그, FA컵, 리그컵,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유로파리그,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 등 수많은 우승을 경험했다. 에버턴은 루니의 경험과 위닝 멘탈리티에 기대를 걸고 있다.
루니는 보비 찰튼(49골)을 넘어 53골로 삼사자군단 최다 득점자이기도 하다. A매치 최다 출전 신기록까지도 7경기만 남겨뒀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스코틀랜드와 2018 러시아월드컵 예선을 끝으로 잉글랜드 대표팀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그가 돌아갈 곳은 에버턴만이 아니다.
루니에겐 좋은 본보기가 있다. 무결점 스트라이커로 불렸던 안드리 세브첸코는 친정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2006년 첼시 이적 후 내리막길을 걷던 세브첸코는 2009년 씁쓸하게 ‘친정 디나모 키예프로 돌아갔다. 빅리그로 떠난 뒤 10년 만이다.
세브첸코는 디나모 키예프에서 3시즌을 뛰며 공식 대회 30골을 터뜨렸다. 샤흐타르의 독주 체제를 깨트리지 못했으나 디나모 키예프는 2011년 슈퍼컵 우승을 차지했다. 꾸준한 활약을 바탕으로 우크라이나 대표팀에서 활동한 세브첸코는 2012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우크라이나에 유로 본선 첫 승의 선물을 남긴 채.
친정 복귀 후 우승트로피를 안긴 대표적인 선수는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이다. 잦은 은퇴 번복으로 이슈를 만들고 있지만 그의 실력은 변함이 없다.
에스투디안테스에서 성장한 베론은 유럽 생활을 청산하고 2006년 다시 유니폼을 입었다. 반년 만에 아르헨티나 아페르투라(전기리그) 우승을 이끌더니 2009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에스투디안테스를 남미 최강팀으로 만들었다.
에스투디안테스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은 39년 만이었다. 그 해 FIFA 클럽월드컵 결승까지 올라 우승을 눈앞에 뒀으나 바르셀로나의 뒷심에 눌렸다. 베론은 에스투디안테스에서 활약에 힘입어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부름을 다시 받았으며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까지 경험했다.
뉴웰스 올드 보이스 유스 출신 막시 로드리게스도 에스파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이하 AT마드리드), 리버풀을 거쳐 2012년부터 친정에서 뛰고 있다. 아직도 현역이다.
2012-13시즌 클라우수라(후기리그) 우승에 이바지한 그는 2014 브라질월드컵에도 참가했다. 그의 3번째 월드컵. 그리고 준결승 네덜란드전 승부차기에서 4번째 키커로 나가 승리를 확정 짓는 슛을 성공시켰다.
파블로 아이마르(왼쪽)와 후안 로만 리켈메(오른쪽)는 유럽 생활을 정리하고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 둘 다 유스에서 축구를 배웠던 팀의 유니폼만 입었다. 그리고 2015년 나란히 현역에서 물러났다. 사진=ⓒAFPBBNews = News1
◆대미를 장식하다루니는 에버턴과 2년 계약했다. 연봉도 50%를 삭감했다. 에버턴에 대한 애정을 고려하면, 프로 데뷔를 한 팀에서 마지막을 장식할 가능성도 있다.
프로 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곳에서 마무리를 짓는 경우는 꽤 많다. 은퇴 수순이다. 리버 플라테에서 화려하게 데뷔해 U-20 월드컵을 통해 축구팬에 강한 인상을 남겼던 파블로 아이마르와 하비에르 사비올라는 거액을 받고 유럽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택한 팀은 리버 플라테였다. 친정 품에 돌아왔다는 상징성이 컸다. 둘 다 딱 1시즌 만에 은퇴했다.
‘느림의 미학 후안 로만 리켈메는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던 유스팀에 돌아와 작별인사를 했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와 보카 주니어스 유스를 거쳤던 리켈메는 2007년 유럽 생활을 마친 뒤 아르헨티나에서 이 2개 팀 유니폼만 입었다. 그리고 2014년 7월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로 돌아간 후 6개월 만에 유니폼을 벗었다.
2009-10시즌 인터밀란의 ‘트레블 주역인 디에고 밀리토도 빼놓을 수 없다. 인터 밀란에서 5시즌을 뛴 밀리토는 전성기를 누렸다. 월드컵(2010)과 코파 아메리카(2011)에 참가했다. 그러나 밀리토 역시 세월 앞에 장사가 될 수 없었다. 2014년 프로선수로 발을 내딛은 라싱 클럽으로 돌아갔다. 3시즌 동안 21골을 넣은 그는 37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유럽도 다르지 않다. 그 가운데 맨유와 인연이 있는 헨릭 라르손과 에드윈 반 데 사르는 조금 특별한 경우다.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축구화를 벗었지만 친정의 긴급 러브콜에 응했다.
라르손은 헬싱보리 태생으로 고향 팀에서 오랫동안 뛰었다. 2009년 은퇴를 한 뒤 감독까지 역임했다. 하지만 그가 1988년 프로 데뷔를 한 팀은 회가보리였다. 그리고 2013년 회가보리의 코치로 활동할 당시 부상자가 속출하자 직접 선수로 뛰기도 했다.
반 데 사르도 비슷한 경우다. 2011년 맨유에서 은퇴한 그는 아약스에서 행정가로 변신했다. 아약스는 반 데 사르가 프로에 입문한 팀이다.
축구공보다 펜을 더 많이 잡게 된 반 데 사르는 2016년 다시 한 번 골키퍼 장갑을 끼었다. 유스팀으로 뛰었던 노르트베이크가 골키퍼 부상으로 1경기만 부탁했고, 반 데 사르는 흔쾌히 수락했다. 5년 만에 실전이었지만 경기 결과는 1-1 무승부였다. 결과적으로 라르손과 반 데 사르의 ‘현역 마지막 경기는 친정에서 갖게 된 셈이었다.
험난한 여정 끝에 친정으로 돌아와 재기한 뒤 끝까지 달려가려는 선수도 있다. AT마드리드의 페르난도 토레스는 최근 1년 재계약을 했다.
루카쿠가 깨기 전까지 리버풀에서 첼시로 옮긴 토레스의 이적료는 프리미어리그 팀간 거래 최고액이었다. 그러나 첼시 이적 후 토레스는 추락했다. 돌고 돌아 2014년 말 AT마드리드로 돌아갔다.
‘한물갔다는 혹평을 받았던 토레스는 다시 일어섰다. 임대 후 완전 이적한 토레스는 2016-17시즌에도 공식 대회 10골을 넣었다.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 지도 아래 활용가치도 컸다. 경쟁력을 갖추고 팬의 지지도 높은 토레스는 AT마드리드에 대한 충성심도 강하다.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복귀 후 4번째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rok1954@maekyung.com][ⓒ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