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연이틀 긴축 시사 발언을 토해내자 세계 외환·채권시장이 요동쳤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통화긴축에 자극받은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잇따라 긴축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초저금리와 '이지머니(easy money)'에 길들여진 세계경제에 큰 충격이 가해질 수 있다는 우려감이 고조된 것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취약한 신흥국 시장이 추락하는 '긴축발작'(테이퍼 탠트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날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양적완화 축소 가능성을 시사한데 이어 28일(현지시간)에는 마크 카니 영란은행 총재와 캐나다 중앙은행인 캐나다은행의 스티븐 폴로즈 총재가 긴축 시사 대열에 가세했다.
카니 총재는 이날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ECB 연례 콘퍼런스에서 "경기 회복세와 투자, 임금 상승이 견조하면 통화 완화 정책을 일부 제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영국의 기업 활동이 호전되면 금리인상을 준비할 수 있다는 '돌직구' 발언을 덧붙였다. 그는 불과 지난주까지만 해도 아직 금리인상 시기가 오지 않았다고 발언해 완화적 통화정책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날은 기류가 달랐다.
카니 총재 언급에 영국 파운드화 가치는 급등했다. 이날 파운드화는 1.2% 오른 파운드당 1.2956달러를 기록했고 통화정책 변화에 민감한 영국 2년 만기 국채금리는 0.329%에 달해 지난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 이후 최고 수준을 보였다.
알란 루스킨 도이치뱅크 외환전략가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경기부양책을 지속했던 중앙은행들이 뒤늦게 방향을 선회할 가능성에 대해 투자자들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티븐 폴로즈 캐나다은행 총재도 28일(현지시간) 기준금리 인상을 시사했다. 폴로즈 총재는 이날 포르투갈에서 열린 ECB 연례회의에 참석하던 중 방송 인터뷰를 통해 "지금의 저금리가 할 일을 했다"면서 이제 경제성장 기조가 한층 정상화됐다고 언급했다. 금리인상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에 캐나다달러는 미국 달러 대비 1.2% 급등했다.
27~28일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들의 긴축 시사 발언에 금융시장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2013년 테이퍼 탠트럼을 연상케 한다는 해석이 불거지고 있다. 벤 버냉키 당시 연준 의장이 양적완화 축소를 시사하자 미 채권가격이 급락하고 신흥국 시장이 크게 흔들리면서 세계경제가 패닉에 빠진 전례가 있다.
말 한마디에 시장을 뒤흔들 수 있는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신중하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는 불만도 표출됐다. 존 존손 뉴버거버만 선임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중앙은행들이 혼재된 메시지와 소통으로 신뢰를 잃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들이 시장 변동성을 키우는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비토르 콘스탄치오 ECB 부총재는 드라기 총재 발언 이튿날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그는 드라기 총재의 발언 취지가 ECB의 현 완화정책과 어긋난 부분이 없으며 물가 목표치에 근접할 때까지 현 통화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흥국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감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신흥국들의 부채 구조가 여전히 취약한 점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28일(현지시간) 국제금융협회(IIF)는 '글로벌 부채 모니터 보고서'를 통해 올해 1분기 전 세계 부채가 217조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으며 선진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은 오히려 낮아졌지만 신흥국 부채 부담은 늘어났다고 밝혔다.
특히 중국의 GDP 대비 부채비율은 300%를 돌파해 우려감을 키웠다. 올 1분기 기준으로 중국 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은 사상 최고 수준인 45%에 달해 신흥시장 평균치(35%)를 훌쩍 뛰어넘었다. 카스텐 브르제스키 ING 선임이코노미스트는 CNBC에 "부채비율이 높다는건 채무위기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라며 "아시아와 다른 신흥시장에서 부채비율이 늘어나는 것은 이들 국가의 구조개혁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음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뉴욕 = 황인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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