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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심장` 을지로3·4가의 쇠락…38년째 재개발 `추진중`
입력 2017-06-11 17:25  | 수정 2017-06-11 20:07
소규모 철공소가 밀집한 을지로 골목가. 을지로 3·4가는 서울 도심이지만 오랜 기간 재개발에 묶여 제대로 된 정비가 이뤄지지 않은 탓에 건물 및 기반시설 노후화가 심각하다. [한주형 기자]
◆ 낡은 도심부터 재생하라 ④ ◆
지난 7일 오후 을지로3가의 한 골목길. ○○공업, ××기계 등 작은 간판을 붙인 소규모 점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목재합판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플라스틱을 가공해 만든 간판들은 하나같이 낡았는데, 때마침 비까지 내려 영화 속 범죄 현장 같은 분위기였다. 다섯 집에 한 집꼴로는 셔터문이 닫혀 있었고 문을 연 집도 대체로 고요했다. 그라인더로 쇠를 깎던 한 철공소 사장은 "가게 위치가 워낙 후미진 데다 건물도 낡아서 요즘 제품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면서 "10년 넘게 거래해 온 단골 고객사들이 있어 아직 일감이 완전 끊기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철공소는 최근 3년 사이 매출이 반 토막 났다고 한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보니 상태는 더 심각했다. 간판도 없는, 가건물 같은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나마 뜸하던 행인도 자취를 감췄다. 지붕에는 빗물 누수를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천막이 대충 덮여 있었고 전깃줄은 어지러이 얽혀 있었다. 서울의 한복판 을지로, 그것도 대로변에서 100m도 채 들어가지 않은 골목의 오늘날 모습이라곤 믿기 힘들었다.
을지로 공장거리는 일제강점기 남산 주변에 모여 살던 일본인에게 제공할 생필품을 만들기 위해 조성되기 시작됐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 대한민국 산업화의 심장으로 탈바꿈했다.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제품은 직간접적으로 세계 각국에 수출됐다. 다양한 업종이 밀집해 있어 '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드는 곳'으로 통했다. 지역 기술자들은 스스로 장인이라는 자부심이 넘쳐났다.
하지만 도시가 늙어가면서 을지로는 점점 흉물로 변해갔다. 특히 을지로3가 교차로부터 을지로5가 교차로 사이 약 800m 구간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기반시설 노후화가 심각하다. 을지로와 청계천로를 잇는 골목길은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사람이 찾지 않는 동네가 된 지 오래다.
안전도 취약하다. 전깃줄 설치 높이가 낮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 누전 위험이 높다. 또 페인트나 화학용액 등 불에 잘 타는 물질이 많아 쇠를 깎거나 용접하는 과정에서 불똥이 튀어 화재가 날 수도 있다. 실제 지난해 5월 인근 인쇄소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지난달에도 목공소에서 화재가 일어나 근처 건물에 거주하던 세 모녀 일가족이 참변을 당했다. 이처럼 을지로가 '도심 속 섬'과도 같은 낙후지가 된 가장 큰 원인은 지지부진한 재개발이다. 1979년 세운상가 일대 재개발구역 지정을 시작으로 다섯 번의 재개발이 추진됐지만 모두 무산됐다. 잘게 쪼개진 토지 소유권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개발이 추진되니 건물주는 건물 개·보수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재개발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다만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방식이 아닌, 기존 산업 생태계를 보존하는 도시재생이 추진되고 있다. 지난해 을지로3가역 수표동 일대가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됐고 올해 4월에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2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이 서울시 사업시행인가를 획득했다. 가장 노후화가 심각한 구간은 서울시의 세운재정비촉진지구상 3구역과 5구역에 해당한다. 서울시는 종묘에서 출발해 세운상가를 거쳐 남산까지 연결되는 공중산책로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만난 소상공인들은 서울시의 도시재생 취지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철공소 밀집 지역에서 작은 매점을 운영하는 A씨는 "재개발이니 도시재생이니 방법은 상관없다"며 "이 지역 상인들은 하루빨리 주변 환경이 개선되고 상권이 활성화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세운대림상가 인근에서 조명 유통가게를 운영하는 B씨는 "시장이 바뀔 때마다 재개발계획을 수립했다가 무산되는 걸 지켜보는 것도 이골이 난다"며 "산책로 만드는 데 쓸 돈이 있으면 낡은 건물이나 보수해줬으면 좋겠다"고 질타했다.
을지로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경쟁력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서울 시내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동대문과 명동을 연결하는 최단 구간이 바로 을지로다. 실제 5·6가는 이미 동대문 상권으로 편입돼 호텔 등 고층 건물이 활발히 들어서고 있으며 1·2가는 시청 업무지역으로 편입돼 도심에 걸맞은 모양새를 오래전에 갖췄다. 3·4가 환경이 제대로 정비된다면 명동~을지로~동대문으로 연결되는 거대 업무·관광 벨트가 형성될 수 있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도심지는 언젠가는 민간에 의해 개발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 영세 소상공인은 높은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점차 쫓겨난다"며 "너무 늦기 전에 공공이 나서서 소상공인 보호와 국가적 편익을 두루 챙길 수 있는 묘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주무관청인 중구청도 을지로3·4가 일대 환경정비의 시급성은 인정하고 있다. 다만 지역 특수성을 감안해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을지로3·4가 공장들은 국가 차원에서 아직 없어져서는 안 될 '뿌리산업'이라는 논리다.
중구청 관계자는 "을지로 전통산업의 연속성이 끊기지 않으면서 근본적인 환경 개선이 이뤄질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며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작용 없이 신속한 도시재생을 할 수 있는 해법은 간단하다. 정부나 서울시가 나서서 재원을 쏟아붓고 이해관계를 조율하면 된다. 하지만 지역 형평성 측면에서 현실성이 떨어진다. 결국 최선책은 소상공인 상생 요구를 수용하면서 정비사업을 주도할 만한 민간 사업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지역 잠재가치를 고려할 때 약간의 규제 완화만 있으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기획취재팀 = 박인혜 팀장 / 정순우 기자 / 김강래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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