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 최고 책임자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끔찍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재협상 또는 폐기되기를 원한다"고 직격탄을 날리면서 한미 FTA 재협상 가능성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지난 18일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연설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언급했던 '개정'(reform)이나 윌버 로스 상무장관이 25일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하면서 쓴 '재개'(reopen)라는 완화된 단어 대신 '재협상(renogotiate)' 또는 '폐기(terminate)'를 직접 언급한 것은 돌직구에 가까운 직설적 표현이라는게 관가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한미 FTA에 대해 미국 고위 당국자가 '폐기'라고 발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통상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발칵 뒤집혔다.
산업부 관계자는 28일 매일경제신문과 통화에서 "지난 주 산업부 관료들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미국 측은 한미 FTA와 관련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며 당혹스러워 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아 진행한 언론 인터뷰에서 북핵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언급하는 와중에 한미 FTA 얘기가 나온 것 같다"며 "발언 취지와 배경 등을 공식 채널을 통해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다른 산업부 관계자는 "현재까지 미국 측으로부터 한미 FTA 재협상 관련 공식 요청을 받은 바 없다"며 "한미 FTA 효과를 미국 측에 지속적으로 설명하는 한편 대응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미 FTA 재협상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지만 정작 한국 정부는 '원론적인 수준의 발언' '당장 재협상을 요구한 것은 아니다'며 의미를 애써 축소해 왔다. 여기에 "한미 FTA의 상호호혜적인 성과를 미국 측에 잘 설명하고 있고, 미국도 이에 동의하고 있다"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안일한 태도로 일관했다.
당초 트럼프 행정부 출범 당시부터 한미 간 통상 채널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 나왔는데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100일 동안 주형환 산업부 장관을 비롯한 한국 통상관료들이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한게 아니냐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미국 일본 싱가포르 등 12개국이 참여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행정명령에 전격 서명한 데 이어 조만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탈퇴 행정명령에 서명할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멕시코, 중국, 일본, 독일에 이어 캐나다까지 통상 갈등을 야기한 트럼프가 한국으로 전선을 확대할 의중을 내비친 것이다. 트럼프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스티브 배넌과 피터 나바로와 같은 초강경 보호무역주의자들의 입지가 약화됐다는 분석이 한 때 제기됐지만 트럼프 그 자신이 강경론자임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 셈이다.
한미 FTA는 한쪽 당사국이 다른 당사국에게 협정 종료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서면으로 통보한 날부터 180일 후에 종료된다. 이에 대해 상대국은 180일 이내에 협의를 신청할 수 있다.
미국에선 FTA 등 관세 관련 협정 체결 권한을 의회가 갖고 있다. 행정부는 의회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뒤 실무 협상에 나선다. 그러나 협정 폐지 절차에 대한 규정은 구체적으로 정해 놓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 동의 없이 FTA를 폐지한다면 법적 논란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김성태 한국개발연구원(KDI) 거시·금융경제연구부장은 "FTA 재협상을 시작하면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며 "양보할 부분이 있다면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있기 때문에 중립적으로 냉정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경제연구원은 한미 FTA 재협상 시 오는 2021년까지 총 수출손실이 269억달러, 일자리 손실이 24만개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양허정지로 특혜관세 효력이 종료되면 자동차 산업에서 한국이 입을 수출 손실이 133억달러로 추산된다. 기계(47억달러), 정보기술(30억달러), 석유화학(18억달러), 철강(12억달러), 가전(11억달러) 등도 타격이 예상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한미 FTA 폐기로 대미 수출에 대한 관세가 FTA 발효 이전 수준으로 상승할 경우 올해부터 2020년까지 대미 수출 총손실액이 130억1000만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대미 수출 손실에 따른 국내 고용감소분은 4년간 12만7000명으로, 연 평균 3만2000명에 달한다.
[뉴욕 = 황인혁 특파원 / 서울 = 고재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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