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19일 있었던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의 한중일 3국 방문 일정은 한국 외교에 많은 의문점을 남겼다. 한국에서 사드 보복 자제를 강조했던 틸러슨 장관은 막상 중국에서는 사드라는 단어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을 '가장 중요한 동맹국'으로 표현한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중요한 파트너'라고만 밝히기도 했다.
틸러슨 장관이 한국 방문시 공식 만찬 일정이 없었던 것도 논란이 됐다. 일본 방문에서는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과의 만찬 일정을 소화했던 것에 대비되는 행보였다. 한국 측의 만찬 초청이 있었는지 여부를 떠나 틸러슨 장관의 방한 일정은 일본과 비교할 때 무게감이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리더십이 실종된 상황에서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소외되는 현상이 드러난 단적인 예다.
북핵 위기와 중국의 사드 보복 등 이슈로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고 있지만, 한국을 뺀 채 한반도 사안을 논의하는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의 수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국을 건너뛰는' 사례는 틸러슨 장관의 한중일 방문 이전부터 이어졌다.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미국으로 초청해 정상회담을 열었다. 북핵과 관련해 공동 대응 방안을 조율했을 것이라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한반도 사드 배치 문제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밀착 공조에 나서고 있다.
코리아 패싱은 다음달 미·중 정상회담에서 절정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다음 달 미국에서 첫 정상회담을 갖는다. 한반도 문제의 해결책을 놓고 초강대국끼리 담판을 벌일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연구본부장은 "한반도 주변국은 모두 확고한 국내 지지를 기반으로 한 강성 리더십이 안정적 정책여건 속에서 작동중"이라며 "한국이 처한 외교안보 여건은 미국, 중국, 일본, 북한발 4각 파도가 동시다발적으로 도전을 제기하는 퍼펙트스톰(perfect storm)이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은 외교 리더십의 실종으로 이에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코리아 패싱을 막을 수 있는 외교전략 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본부장은 "사드 배치, 대북제재, 한일정보보호협정(GSOMIA) 등 주요 외교안보 문제에 있어서 정치권이 서로 상충되는 견해를 쏟아내고 있다"며 "이는 안보 문제를 둘러싼 심각한 '적전 분열' 행태"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더해 이제는 '한국 때리기', 즉 코리아 배싱(Korea Bashing)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사드 보복이 대표적이다. 관영언론인 환구시보는 사설을 통해 성주에 배치될 사드 기지를 정밀타격(surgical strike)하자는 주장까지 내놨다. 중국은 관련 당국을 총동원해 한국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중국 소재 롯데마트 점포의 90%가 정상 영업을 못하고 있고, 화장품 업체들은 중국 현지 공장 가동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특히 지난 15일 중국 국가여유국은 한국행 여행 상품의 전면 판매 중단을 지시하기도 했다.
올해 초 일본 문부과학성은 초·중학교 사회 수업에서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로 다루라고 명기한 학습지도요령 개정안을 발표했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학습지도요령에 '독도는 일본땅'이 들어간 건 처음이다. 한국의 리더십 실종상황을 틈타 한국을 자극하는 의도적인 도발이라는 게 중론이다.
한국 외교부는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를 불러 항의했지만, 일본은 미동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설치된 것에 항의하며 귀국한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는 한국으로 돌아올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다.
대북외교 또한 전략이 없긴 마찬가지다. 개성공단 폐쇄 이후 남북간의 핫라인은 완전히 두절된 상태다. 미국과의 대화만 고집하는 북한은 지난해 미국과 비공개로 접촉한 데 이어 반민반관 1.5트랙 회동을 추진하고 있다. 사드 배치 이후 북한과 중국간의 우호관계가 공고해지는 가운데 한국은 북핵외교에 사실상 손을 놓은 상황이다. 전직 외교부 관료는 "정부의 가장 중요한 외교전략은 북핵 문제의 주도적 해결에 방점이 있었다"며 "하지만 현실은 북한의 막무가내식 핵개발에 대해 미국·중국의 협조를 구하는 수준의 대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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