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개혁파 지도자였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부인 리자오(李昭)가 11일 베이징 셰허(協和)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96세.
12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후 전 총서기의 셋째 아들 후더화(胡德華)은 "모친이 오늘 오후 4시18분 영면했습니다. 평화롭고 아무런 고통 없이 가셨다"고 말했습니다.
장례식은 오는 17일 바바오산(八寶山) 혁명열사 묘지에서 치러질 예정입니다.
1921년 안후이(安徽)성 쑤청(宿城) 태생의 리자오는 1939년 공산당 근거지였던 옌안(延安)의 중국여자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총정치부 조직부장이던 후야오방과 교제를 시작해 1941년 결혼했습니다.
신중국 성립 이후 베이징시 방적공업국 당서기를 지냈던 리자오는 문화대혁명 종료 후 후야오방이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추종세력)로 몰려 박해를 받았던 이들을 복권시키는 업무를 맡을 당시 이들의 사연을 접수하는 창구 역할을 했었습니다.
이후엔 베이징의류업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남편인 후야오방은 1980년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총서기로 발탁돼 개혁·개방정책을 강화하고 민주화 움직임에 호의적 모습을 보이다 보수파의 역공을 받아 다시 덩샤오핑에 의해 축출됐습니다.
'비운의 총서기' 후야오방이 1989년 4월 심장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에 대한 추모, 재평가 요구 활동은 1989년 6·4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와 유혈진압 사태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리자오는 남편이 권력층에 올랐을 때도 매일 직장까지 걸어 다니고 도시락을 싸고 다니는 모습을 보이며 후야오방이 청렴한 개혁파 지도자로서 당시 청년들의 존경을 받게 하는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리자오는 남편의 묘소를 남편이 세웠던 장시(江西)성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본부로 이장하고 비석에 자신이 직접 서예로 쓴 "공명정대하며 사심도, 부끄러움도 없다"(光明磊落 無私無愧)라는 비문을 새겼습니다.
후더핑(胡德平) 전 중앙통일전선부장과 개혁성향 이론지인 옌황춘추(炎黃春秋) 부사장을 지낸 후더화 등 3남1녀의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후야오방은 공청단 계열인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체제가 들어선 2000년대 들어 명예회복이 이뤄지기 시작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15년 시진핑(習近平) 주석에 의해 공식 복권이 완료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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