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서 일식 주점을 새로 연 김모(33)씨 개업식날. 건물 내부에 차린 고사상에는 돼지머리 대신 웃고있는 돼지 모양 떡이 올라와 있다. 몇 년 전 부모님과 인근에서 호프집을 열었을 때만해도 김씨는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떠들썩하게 상을 차렸다. 김씨는 "축하객들이 돼지 입과 귀에 돈을 수북히 꽂아놓고 가는 게 축하 관례였다"며 "이젠 손님들도 흉하게 생각하는 것 같고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하 청탁금지법) 시행 이후 돈을 꽂아주는 것도 사회정서상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돼지머리를 떡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자영업자들의 개업식 현장에서 푸짐한 돼지머리 고사상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던 풍속이 동물단체들의 비판에다 청탁금지법 여파까지 겹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다.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서 30여년간 돼지머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박모 (48)씨는 "3~4년 전 만해도 개업식 뿐 아니라 연초, 초하루, 초사월 등 고사를 지내는 날이면 돼지머리를 찾는 어르신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며 "하지만 요즘에는 연로한 분들이 하는 개업식이나 시산제(산악인들이 매년 연초에 지내는 산신제)를 제외하고는 돼지머리 주문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업체는 수년 전만 해도 한 달에 200여건의 주문을 받았지만 지금은 기껏해야 3분의 1수준인 70여건으로 '확' 줄어들었다. 온라인에서 돼지머리를 판매하는 다른 업체들도 거의 비슷한 수준의 매출감소를 경험 중이다.
젊은세대나 동물단체들 사이에선 전기충격을 통해 돼지를 도축한 후 머리만 잘라내는 데 대한 혐오감이 커진데다 돼지머리 특유의 비린내 등도 기피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한 돼지머리 공급상은 "완전히 익혀서 고사상에 올려놓으면 흐물거려서 그 모습을 유지할 수가 없어 살짝 익힌 다음 고사상에 올리는 경우가 많다"며 "그렇다보니 실내 공간 전체에 비린내가 퍼지기 일쑤여서 젊은층은 다소 기피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사후 처리도 골칫거리다. 고사용 돼지머리 가격은 5만~8만원선이지만 이를 음식으로 먹기 위해선 추가로 5만~10만원을 들여야 한다. 예전엔 전통시장에 고사를 치른 돼지머리를 완전히 익혀 누른 고기로 만들어주는 곳이 제법 있었지만 이젠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는 게 시장 상인들 얘기다.
대신 고사상에서 돼지머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돼지머리 모양 케이크나 떡 등이 들어서고 있다. 국내 최초 돼지머리 케이크 판매업체인 단미케이크의 최연화(33) 사장은 "4년 전 처음 문을 열었을 때엔 일주일에 한개 팔릴까 말까 했는데 요새는 하루에 한 건 정도의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돼지머리 케익을 찾는 고객은 주로 개업을 앞둔 30~40대. 개당 10만 원이 넘지만 실제 돼지머리의 크기와 모양을 본따 만들어 개업식용으로 인기가 높다.
[연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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