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전국 민생투어를 갈무리하고 본격 정치행보에 들어갔다. 20일 국회의장과 대통령 권한대행, 종교지도자들을 예방한 데 이어 조만간 유력 정치인들을 만나 정치세력 규합에 나설 전망이다.
반 전 총장은 이날 조계사에서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일정을 잡아서 가능한대로 빨리 (정치인들을) 만나겠다"고 밝혔다. 19일 이명박 전 대통령을 예방한 이후, 현직 의원들과 대권주자 등 현실정치의 키 플레이어들을 본격적으로 만나겠다는 의미다.
반 전 총장은 경제민주화 주창자인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개헌을 통한 '제7공화국'을 주장하는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의 만남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최근 김 의원과 손 전 대표는 물론 중도 빅텐트의 핵심고리인 국민의당이 귀국 후 시원찮은 지지율 행보를 보이는 반 전 총장에게 거리를 두고 있어 실제 만남이 이뤄질지 불확실한 상태다.
지난 19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참석을 위해 방미한 손 전 대표는 "반 전 총장이 아직은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 가겠다는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서 좀 더 지켜보려 한다"며 거리를 뒀다. 반 전 총장이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한 데 대해 손 전 대표는 "뜨거운 얼음 같은 이야기"라며 "오랜 기간 외교 공무원으로서 보수적인 바탕에서 살아왔고, 보수만 갖고는 안되니 진보를 얻겠다는 생각에서 한 말이라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설명했다.
반기문 캠프에선 '충청의 대부'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 예방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국가 어른으로서 보수 진영 결집을 위해 직접 예방해야한다는 의견과, 구태의연한 기성정치를 벗어나고 충청 프레임에 갇히지 않으려면 전화 통화로 충분하다는 목소리가 엇갈린다.
반전 총장은 신당 창당이나 기성정당 입당 등 자신의 정치적 거취에 대해 "아직은 결정한 것이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반 전 총장은 이날 오전 국회 의장단을 방문한 자리에서 국민의당 소속 박주선 국회 부의장이 "입당을 결정하셨나"라고 묻자 이같이 말했다. 또 박 부의장이 "총장님 정체성이 국민의당에 맞지 않나"라고 덕담하자 "고맙다"고 가볍게 웃어넘겼다.
반 전 총장은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국민이 경제라든지, 여러 가지 정치 상황에 대해 많이 어려워하고 걱정하는 것을 듣고 봤다"며 "국회에서 많은 신경을 써주는 것이 필요하다. 대통령 탄핵절차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특히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국회의원은 국민의 의견을 직접 듣기 때문에 제가 항상 국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며 "저는 의회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이라고 했다.
국회에서 기다리고 있는 취재진이 2013년 미국 교수가 쓴 대담집에서 '반 총장은 일본이 이웃 국가들과 유익한 관계를 맺기 위해 이틀에 한 번꼴로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표현된 점을 계속 거론하며 입장을 묻자, 반 전 총장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일축했다.
국내 치열한 정치·언론 환경 속에서 좌충우돌했던 반 전 총장은 자승 총무원장을 만나 위로를 받았다.
비공개 회의에서 자승 원장은 "이 길 가는데 소낙비가 쏟아지는걸 당연히 생각하시라. 허물과 험담도 낙으로 생각하시라."며 덕담을 건냈다. 또 자승 원장은 "저도 전철을 어떻게 타는지 모른다. 누구나 익숙치 않은일이 있기 때문에 애교로 받아들일수 있는데."라고 덧붙였다. 반 전 총장은 "그런것들이 다 공부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회답했다. 반 전 총장은 특히 열린 마음으로 국민만 보고 끝까지 최선 다하겠다"고 말했다고 배석한 박진 전 의원이 전했다.
이런 가운데 반 캠프에 합류했던 곽승준 고려대 교수가 이날 돌연 하차했다. 곽 교수는 매일경제와 통화에서 "저는 반기문 전총장을 존경하고 개인적 친분이 있어 반 전 총장 귀국 준비를 도왔다. 이제 귀국이 마무리 되고 역할이 끝나 저는 원래의 일상 생활로 다시 돌아간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 정치적인 확대 해석은 하지 말아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친 이명박(MB)계 대표 정책통으로 반 전 총장 측에서 정책개발에 몸담았던 곽 교수가 물러나면서, 반 캠프의 인적쇄신이 일어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곽 교수는 캠프외곽에서 정책개발 등에 참여해왔지만 최근 미국에 머물면서 반 캠프 측과 거리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또다른 MB계 핵심인사도 캠프 중심에서 밀려난 것으로 알려졌다. 반 전 총장 주변에 MB계 인사가 다수 포함돼 있다는 점이 정권교체의 민심에 반한다는 대내외 여론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워싱턴 = 이진명 특파원 / 서울 = 전범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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