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 물대포에 맞은 뒤 숨진 고(故) 백남기(69) 농민이 6일 오후 고향인 보성·광주 노제를 끝으로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됐습니다.
유족들과 장례위원회는 보성장례식장에 안치된 고인의 시신을 전남 보성군 웅치면 생가로 운구해 이날 오전 8시 30분 제사를 지냈습니다.
9시 30분부터는 보성역 광장에서 노제가 열렸습니다.
백남기 전남 투쟁본부 주관으로 열린 노제에는 고인의 지인과 시민사회 관계자 등 50여명이 참석해 추모사 낭독, 헌화·분향, 추모 살풀이공연 등이 이어졌습니다.
고인의 시신은 보성역부터 군청까지 운구된 뒤 광주로 옮겨졌습니다.
정오부터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5천여명 이상의 시민들 참여 속에 노제가 열렸습니다.
평생을 민주화운동과 농민운동에 헌신한 약력 소개를 시작으로 각계각층의 조사가 잇따랐습니다.
특히 히다얏 그린필드 국제식품연맹(IUF) 아태지역위원회 사무총장도 조사를 통해 "백남기 농민의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고 밝혔습니다.
백씨의 딸 백민주화씨는 "아버지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단 한 번도 의식을 되찾지 못한 지난 317일 동안과 그 이후에서 마음껏 슬퍼한 적이 없다"며 "그런 저희 가족 곁에 함께 해주신 많은 국민 덕분에 그 시간을 다 이겨냈다"고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노제를 마친 뒤 금남로에서 대인시장, 광주고 앞, 말바우시장까지 3km가량을 행진한 운구 행렬은 화장의식을 마치고 한 줌 재로 변한 백씨의 유골함을 앞세우고 광주 북구 망월동 5·18 구묘역에 도착했습니다.
천주교식 장례로 1시간여간 열린 하관식은 무덤축복, 영구안장, 헌화, 청원기도, 흙 덮음 순으로 진행됐습니다.
백 농민과 광주고 동급생이었던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은 이 자리에서 "이제 모두 내려놓고 땅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그 모습으로 돌아가 편히 쉬길 바란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고인의 무덤에 흙을 덮고 꽃을 바치며 눈물로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고인의 장례는 사망 41일만인 지난 5일 서울에서 민주사회장(葬)으로 거행됐습니다.
전날 오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천주교 수도자들과 유족 등 일부만 참석한 발인식이 열렸고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장례미사를 집전했습니다.
이어 광화문 광장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고인의 시신은 고향인 보성으로 옮겨졌습니다.
1947년 보성에서 태어난 백씨는 중앙대 행정학과 재학 시절 학생운동에 가담, 1980년 체포됐다가 이듬해 3·1절 특별사면됐습니다.
이후 보성으로 내려가 농업에 종사하며 가톨릭농민회에서도 활동했습니다.
백씨는 지난해 11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1차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 차벽 앞에서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뒤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그는 한 번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다 지난 9월 25일 숨을 거뒀습니다.
유족과 시민단체는 고인이 물대포에 맞아 사망에 이른 것이 명백하다며 책임자 처벌과 사과를 요구했으나 검찰과 경찰은 명확한 사인 규명을 위해 시신 부검이 필요하다며 영장을 청구해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조건부로 발부된 부검 영장은 유족 측의 완강한 거부로 집행 시한인 이달 25일까지 집행되지 못하다가 검경이 영장을 재청구하지 않기로 하면서 비로소 장례 절차가 시작됐습니다.
[MBN 뉴스센터 / mbnreporter01@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