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젊은 남녀가 손잡고 포옹하며 무대 위에서 사랑을 속삭였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의문의 사고로 여자가 세상을 떠나자 남겨진 남자는 절망에 빠진다. 슬픔 가득한 서정적 발라드가 나올 참인가 싶던 차, 마침내 입을 뗀 남자에게선 절절하고 구성진 창(唱) 가락이 뽑혀나온다.
하늘의 신 그대도 보았는가/대지의 신 어디로 데려갔는가(…) 신은 침묵해도 난 그 다음을 묻겠다!”
장례 행렬을 좇던 남자는 결심한 듯 저승으로 눈길을 돌린다. 수천년 전 희대의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21세기 한국땅에서 ‘올페와 ‘애울이란 새 이름으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지난 8일 낮 서울 장충동 국립창극단 연습실은 초연을 2주 앞두고 긴장감과 분주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23일 국립극장 무대에 처음 오르는 ‘오르페오전은 지하세계서 죽은 아내를 데리고 나오는 길 ‘뒤돌아보지 말라는 법을 어겨 영영 이별하고 마는 남편을 그린 비극적 그리스신화를 창극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서양에서는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1607), 글루크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1762) 등 오페라로 만들어진 소재지만 우리 전통예술에서 사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창극이지만 박력 있는 현대무용 군무가 함께 펼쳐지고 거대한 원형 회전무대가 동원되는 등 모던한 요소가 흠뻑 밴 모습이었다. 작곡가 황호준이 새롭게 꾸린 음악 역시 전통 타악기 외에도 피아노, 현악기, 목관악기들의 편성으로 다채롭다.
연습장면을 주시하며 쉴 틈 없이 수십 명의 배우, 무용수, 연주자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이소영 연출(55)은 국립오페라단장 출신의 오페라전문가로 지난해 국립창극단의 ‘적벽가를 웅장하고 세련된 솜씨로 연출해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산 바 있다. 이 연출은 종합예술의 최고봉으로 칭송 받는 오페라에 비해 ‘동양의 오페라인 창극은 세계에 덜 알려져 있는 게 안타깝다”며 창은 우리가 느끼는 사랑과 슬픔의 감정을 훨씬 더 깊게 전달하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창 특유의 강렬한 소리는 이날 올페와 애울의 이별, 장례 행렬 장면 등 감정소모가 큰 장면에서 단숨에 전율을 주며 매우 직관적인 전달력을 발휘했다.
창극이나 판소리 하면 나이 지긋한 명창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과 달리 여기선 20대에서 30대 초반 창극단의 젊은 스타들이 주역을 맡았다. 22세 나이로 창극단 최연소 입단한 이래 빼어난 실력과 외모로 방송 음악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인기몰이중인 김준수와 6살 때 판소리 ‘흥부가를 완창하며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유태평양이 ‘올페 역에 더블캐스팅되며 일찌감치 화제가 됐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배비장전 등의 주역을 거친 창극단의 간판 이소연은 ‘애울을 맡았다.
쉬는시간 만난 이소연은 창극에서 찾아보기 힘든 멜로”라며 노골적으로 극중 상황을 설명하는 판소리와 달리 함축적이고 시적인 대사들이라 외려 소화하기 쉽지 않다”고 귀띔했다. 오페라나 뮤지컬처럼 무용수들의 비중이 큰 것도 특징이다. 안무를 총괄한 현대무용가 김보람은 창극단원들이 움직임에 덜 익숙하다보니 이들이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정확한 동작을 구상하는 게 포인트였다”고 했다.
‘오르페오전은 이달 시작된 국립극장의 2016-2017 시즌의 개막작이다. 공연은 23~28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02)2280-4114
[오신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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