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신간] 공백과 성찰의 시간, 밤에 대하여
입력 2016-07-29 14:07 

영국 제임스 1세 시대 시인 토머스 미들턴은 밤을 이렇게 정의했다. 잠자고 먹고 방귀 뀌는 것밖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밤은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고, 역사의 무시된 공백이었다. 미국 버지니아공대 역사학 교수인 로저 에커치는 사람들이 밤의 영역을 침범해 그 신비를 벗긴 것은 1730~1830년의 일”이라고 말한다. 641쪽에 달하는 이 두터운 책은 일기, 편지, 여행기, 잡지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밤이라는 공백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본다.
수천년 간 밤은 죽음의 공포를 상징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초기의 많은 문명권에서는 어둠을 죽음과 동일시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밤마다 거리의 등이 빛을 만들어내는 현대인들은 중세의 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공포였는지 알 수 없다. 근대까지도 밤이 다가오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문을 걷어닫는 일이었다. 떠돌아다니는 도둑과 짐승의 악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빗장이 집집마다 있었다. 촛불과 램프는 어둠을 몰아낼 수 있었지만, 화재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통행금지라는 뜻을 지닌 영어 ‘curfew의 어원이 ‘불에 재를 덮다는 것임을 봐도 그 시절 화재가 얼마나 빈번했는지 알 수 있다.
통행금지에서부터 야경꾼에 이르기까지 밤의 활동을 제한하려고 만든 교회와 국가의 다양한 억압적 조치도 만연했다.

밤에는 다른 얼굴도 있었다. 밤은 가난한 사람들, 노예, 동성애자, 종교적 소수자에게 도피처가 되었다. 적어도 그 시간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다고 느꼈다. 미국의 노예들은 밤에 인접 농장에 있는 배우자를 만나거나 춤판을 벌이기도 했다. 밤은 수치를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어둠은 일상으로부터 피신할 안식처를 제공했고, 자유를 주었다.
책에서 흥미로운 장은 ‘밤의 영토를 소개하는 대목이다. 내부를 가린 장소는 사회적 제약을 완화하면서 가족, 친구, 연인들에게 친밀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어둠이 내리면 권력은 강한 자들에게서 약한 자들로 옮겨갔다. 강렬한 낮의 햇살 속에선 개인의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았다. 밤은 사생활의 영역을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오월제는 밤이되면 무질서해졌다. 사육제 기간에 몇몇 나라는 밤이 되면 가면을 쓰는 걸 금지할 정도로 화려한 축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술집도 하층 계급을 받아들였다. 술집은 남자들의 사교 거점이었다. 농담을 하고, 술을 마시며, 일과 가족을 피할 도피처로 술집을 찾았다. 성적인 만남도 이뤄졌다. 침침하고 붐비는 곳에서 술을 마시고 구애하고 수작을 걸었다. 술집은 가정생활의 대체물이었던 것이다. 보수적인 사회였지만 간통은 흔한 일이었다. 보카치오, 사케티 등 이탈리아 작가의 이야기에는 밤의 밀회가 수없이 등장한다.
산업화 북부 유럽에서는 ‘번들링이란 관습이 있었다. 젊은이들의 열정을 통제하고자 하는 어른들이 만든 관습이었다. 연인들이 여자 부모의 집에서 관계를 갖지 않고 밤을 새우는 걸 말한다. 북부와 달리 남부에서는 세레나데를 불러 구애했다. 종교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번들링은 유럽 일부에서 19세기까지 지속됐다.
중간층과 상류층은 침실이 밤의 공간이었다. 개인적 성찰의 위한 시간을 즐겼다. 희미한 촛불에 그리스어를 공부하거나, 인쇄물을 읽었다. 낮은 노동에 의존하고 밤은 생각에 의존한다”는 말이 전해지던 시절이었다. 말하자면 오랫동안 유럽에서 밤이란 사교와 성과 고독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16세기 한 노래는 이렇게 불려졌다. 밤을 환영하라/ 가난한 사람과 귀족 모두에게 갑절의 즐거움이니.”
근대 이후 만들어진 인공 조명은 ‘밤의 역할을 뒤집었다. 19세기 등장한 가스등과 직업 경찰은 대서양 양안의 밤 생활을 변화시켰다. 1823년에 런던에는 4만여개의 가로등이 200마일의 길거리를 밝혔다. 가스등은 낮과 밤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했고, 삶의 속도를 바꿔놓았다.
어둠을 밀어냄으로써 생활이 풍요로워졌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저자는 지적한다.석탄 가스는 냄새가 났고, 공해의 원인이 됐다. 밤이 밝아지면서 공공장소를 감시하는 일이 용이해졌다. 밤에 더 많은 검문을 당했고, 가로등은 ‘경찰등으로 불렸다. 하루가 길어지면서 수면 패턴은 간결해졌다. 근대이전 일찍 잠들고 두어차례로 나눠서 이뤄지던 수면은 짧아졌다. 집중적인 수면 형태는 꿈과의 연결점도 잃어버리게 했다.
이같은 이유로 몇몇 대도시는 인공조명을 거부하기도 했다. 폭동이 일어나면 가로등부터 피해를 봤다. 1830년 파리를 배경으로 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는 고아 가브로슈가 가로등과 함께 음헌한 국왕 권위의 모든 상징이 파괴되었다”며 주거 지역의 랜턴을 파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 도달한 뒤 별자리는 보이지 않고 텅 빈 하늘만 남은” 현대의 밤에 대해서 의문을 던진다. 어둠이 줄어들면서 사생활과 친밀감과 자아 성찰의 기회도 드물어질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이 밤의 예찬론자가 그리워하는 건 우리가 잃어버린 밤의 고요함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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