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브렉시트는 브렉시트" 뒤로 英 캐머런 총리 '쓸쓸한 퇴장'
입력 2016-07-12 15:20 
브렉시트는 브렉시트/사진=연합뉴스
"브렉시트는 브렉시트" 뒤로 英 캐머런 총리 '쓸쓸한 퇴장'



2005년 영국 보수당의 젊고 혁신적인 지도자로 혜성처럼 나타나 6년 동안 총리로 재임한 데이비드 캐머런은 다른 모든 성과 대신, 영국을 유럽연합(EU)에서 탈퇴(브렉시트)시킨 총리로 영원히 역사에 남게 됐습니다.

2005년 마이클 하워드 대표가 총선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캐머런 총리는 보수당 개혁과 집권을 내걸고 일반 당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표에 선출됐습니다. 당시 나이는 39살이었습니다.

마거릿 대처나 존 메이저 등 자수성가형 지도자들을 좋아했던 보수당 내에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그는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윌리엄 4세의 후손으로 여왕의 먼 친척이기도 한 그는 1960년대 이후 주식 중개인의 아들로 태어나 귀족학교로 불리는 이튼 스쿨과 옥스퍼드대를 다녔습니다. 대학 때는 폭음과 악행으로 악명 높은 클럽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2010년 총선에서 13년 만에 노동당을 제치고 제1당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하면서 총리에 올랐습니다. 200년 만에 나온 가장 젊은 총리였습니다.

2013년 당내 보수파를 잠재우고 두 번째 임기에도 사회적 개혁을 이어가기 위해 처음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공약으로 내걸었을 때만 해도 브렉시트가 현실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2014년에도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주민투표에 동의해 주는 '도박'을 걸었지만 결국 잔류파가 승리하면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의지를 잠재운 성공 사례도 있었습니다.

2015년 총선에서 완승한 이후 그는 EU 내에서 영국의 지위를 재정립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브렉시트는 현실이 됐습니다.

쉽게 이길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 달리 국민투표는 영국 사회의 세대, 지역, 계층 간 분열을 드러내며 캐머런의 정치적 도박은 참패했고 졸지에 영국을 위기에 빠뜨린 총리가 됐습니다.

캐머런은 실용주의자, '따뜻한 보수주의자'를 자처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가 이념이 불분명하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지만, 상황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수정할 수 있었다고 BBC 방송은 평했습니다.

그는 전후 처음으로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하고,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는 노동당과 연대하는 등 정치적 반대파와도 손을 잡는 데도 유연함을 보였으며, 분배 정책이나 기후 변화, 동성 결혼 등의 이슈에서도 기성 보수당보다 진보적이었습니다.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재정적자 타개를 위해 강력한 긴축 정책을 추구했고, 지난 4월에는 조세회피처 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금융 기록을 공개했다가 상속세 회피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MBN 뉴스센터 / mbnreporter01@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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