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현지시간) 영국 브렉시트 투표 결과가 나오자 미국 텍사스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브렉시트가 현실화하자 텍사스 독립도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텍사스 분리주의자들의 기대감에 찬 목소리였다.
텍사스 분리주의(TNM)은 미국 연방에서 떨어져 나와 별도 국가로 독립하자는 움직임이다. 4년 전인 2012년에만 하더라도 이같은 주장에 동조하는 텍사스 내 카운티는 1곳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22개 카운티로 늘었다.
텍사스는 본래 멕시코의 한 주였으나 전쟁을 통해 1836년 멕시코에서 독립, 텍사스 공화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경제난에 봉착하면서 1845년 미국의 28번째 주로 편입됐다.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 존치에 찬성하고 연방제에 반대했던 텍사스는 수시로 독립을 추구했으며 최근 세계적으로 고립주의 움직임이 확산되자 독립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는 양상이다.
텍사스 뿐만이 아니다. 브렉시트 개표 결과가 발표된 6월 24일은 기독교성 세례 요한의 날로 캐나다 퀘벡주에서는 분리독립운동의 상징적 축제일로 자리잡은 날이다. 이날 축제를 위해 모인 분리독립 지지자들은 브렉시트 결과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퀘벡주 분리독립을 기치로 내건 퀘벡당의 차기 지도자로 꼽히는 알렉상드르 클루티에 의원은 영국과 퀘벡의 상황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브렉시트 투표 표차이가 아주 근소했음에도 세계가 곧장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라 밝혔다.
스페인 카탈루니아 독립운동을 펼치는 이들도 브렉시트 결과에 축배를 들었다. 분리독립운동 시민단체 ‘카탈루니아 의회의 조르디 산체스 회장은 스코틀랜드도 EU 잔류를 위한 국민투표에 돌입했다. 우리도 국민투표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야 할 시점”이라 주장했다.
이같은 고립주의는 브렉시트를 선택한 영국인들의 속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영국 국민들이 세계 최대 단일시장인 유럽연합(EU)을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반세기동안 이어온 세계화를 향한 분노가 표출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유럽 국가들이 상호 의존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EU 영향력은 비대해졌지만 영국 국민은 영국이 EU 성장에 기여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자신들도 경제적 사각지대에 놓였다는 것이다.
세계화의 장점을 부각해온 국제통화기금(IMF)도 이런 움직임에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다. 모리스 옵스펠드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자유무역은 반드시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며 우리는 아직도 패자에게 적절한 보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자본주의 4.0의 저자이자 세계적 경제평론가인 아나톨 칼레츠키는 지난 17일 기고전문 웹사이트 ‘프로젝트 신디케이트를 통해 전문가들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음에도 많은 나라에서 민족주의 감정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특징은 매우 유사하다”며 앞으로 전세계에는 고립주의 열풍이 불 것”이라고 지적했다. BBC는 난민 위기와 테러가 잇따르면서 국자 정체성을 우려하는 여론이 커졌다”며 ‘타국민보다는 자국민 우선이라는 분위기가 극우 정당의 고립주의 정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에서는 브렉시트 투표에서 ‘EU 잔류 지지율이 높았던 런던 지역에서도 런던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EU에 합류해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에 15만7000여명이 서명했다.
신고립주의를 주창하는 트럼프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는 미국 민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막말과 기행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은 ‘미국 최우선(America First)에 주목한 탓이다. 트럼프가 예상 밖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공화당 대선후보 자격을 따낸 것은 외부로부터의 이민 차단, 난민 수용 반대, 보호무역으로 회귀, 강경한 대외정책 등 트럼프의 독특한 공약이 미국인들에게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주로 백인 보수층인 트럼프 지지자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장악하는 것에 불만을 가져왔다. 또한 오바마 정권의 소극적인 외교정책 역시 ‘강한 미국이라는 자부심에 상처를 줬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57%가 미국은 자국 문제에 신경 쓰고 다른 나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주장했다. 또 응답자의 41%는 미국이 너무 과도하게 대외 개입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70%는 차기 대통령이 집중해야 할 과제로 국내 정책을 꼽았다. 미국 대통령이 대외정책에 주력해야 한다는 응답은 17%에 불과했다.
중동·아시아에서도 자국 우선주의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정치권은 세계화로 인해 자국의 약자에게 돌아가야 할 관심과 보상이 제공되지 못했다는 것을 빌미로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와 고립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이웃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이익 극대화를 추구해 왔던 중동 석유 카르텔의 붕괴는 고립주의의 한 단면이다.
지난해 말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등 12개국으로 구성된 OPEC은 유가하락을 저지하기 위해 생산량 한도 설정을 시도했으나 끝내 무산되면서 중동 각 산유국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시장점유율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증산에 나서는가 하면 미국의 경제제재가 해제된 이란은 본격적인 석유 수출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전면에 등장했다. 중국은 인근 동북아·동남아 지역 국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중국해에서 ‘마이웨이를 택해 고립주의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주변 국가들과 끊임없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분쟁 중인 도서지역에 군사시설 설치를 강행하는 것 등이 자국 이기주의에 근거한 고립주의의 발로로 풀이된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역시 이번달 외무장관 특별회의에서 공동성명 발표조차 실패하며 ‘헐거운 연합이란 비판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남중국해 문제를 두고 중국과 대립하는 국가와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심각한 국가가 연합내에 혼재하는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높이고 G2(주요2개국)로서 미국과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웃국가들과 공존과 협력을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쳐낸 것이다.
브렉시트를 선택한 영국인들의 인식은 유럽 내 다른 국가들로도 확산하고 있다. 순서 면에서 영국이 먼저 EU 탈퇴를 선언했을 뿐, 다른 유럽 국가들의 탈 EU 움직임도 시간문제라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동유럽의 체코와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같은 북유럽 국가에서 EU 탈퇴 방안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독일과 함께 EU의 중요한 축인 프랑스에서도 국민전선이라는 극우단체가 ‘프렉시트(프랑스의 EU탈퇴)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19일 이탈리아 지방선거에서 두각을 나타낸 오성운동(M5S) 진영도 유로존 탈퇴를 위한 국민투표 필요성을 주장했다.
[워싱턴 = 이진명 특파원 / 서울 = 문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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