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세은 “승부 결정하는 건 점프력·비율 아냐”
입력 2016-06-21 10:33  | 수정 2016-06-29 12:02

가녀린 발레리나는 갓 서빙된 두툼한 스테이크를 한 조각 베어물며 행복하다”고 웃었다. 뒤이은 진한 초콜릿 수플레도 싹싹 비웠다. 오늘의 첫 끼예요. 이런 걸 못 먹으면 너무 힘들어서 죽을지도 몰라요.” 내달 2일부터 파리 바스티유극장서 열리는 두 작품(저스틴 펙·조지 발란신)에서 모두 주역을 맡은 탓에 이날도 종일 쉴 틈 없는 리허설을 마치곤 숨가쁘게 달려왔다. 사람이 이렇게 바쁠 수도 있구나 싶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고단함을 뛰어넘는 생기와 열정이 그득했다.
지난 17일 파리 마들렌성당 인근의 한 레스토랑서 만난 박세은(27)은 간만에 춤이 너무 재미있고 힘이 난다”고 했다. 로잔콩쿠르 우승 후 국립발레단을 거쳐 2011년 한국인 발레리나 최초로 347년 역사의 세계 최정상급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입단, 2013년 주역도 맡을 수 있는 ‘쉬제(솔리스트)로 고속승진한 그이다. ‘라 수르스‘백조의 호수 등에서 동양인 무용수론 처음으로 주역을 맡으며 스타로 부상했지만 박세은에게 지난 1년 반은 시련의 시기였다. 2014년 부임한 뉴욕 출신 안무가 벤자민 밀피에가 클래식발레 위주였던 발레단 전통을 뒤엎고 미국식 네오클래식·컨템퍼러리 발레 등 생소한 시도들을 대거 도입한 탓에 정통 스타일의 기량을 한껏 닦아온 그는 돌연 주역에서 멀어졌고 승급심사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기라성같은 원로 발레단 선배들의 공분을 산 결과였다.
저도 사람이니까 화가 났죠. 우울증, 불면증에도 시달렸어요. 오랜 고민 끝에 ‘내게 주어진 것만 우선 잘하자고 단단히 맘을 잡은 찰나 좋은 소식들이 몰려오더군요.” 감독과의 상담을 통해 그는 서서히 굵은 배역을 따냈고, 단원과 관객의 의사를 무시한 채 지나친 ‘혁명을 추구한 밀피에 감독은 결국 여론에 밀린 형태로 올해 초 감독직을 사임했다. 파리오페라 수석무용수 출신의 신임감독 오렐리 뒤퐁에 대해 박세은은 단연 롤모델”이라며 이 분이 너무 좋아서 파리에 오게됐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클래식 발레를 중시하는 뒤퐁 성향상 그가 다시 활약 궤도에 오를 여지가 커졌다.
난다 긴다하는 최고의 무용수 수백 명이 모여있는 곳에서 매일 춤추는 건 어떤 느낌일까. 여기 올 들어올 정도의 사람들은 실력이 엇비슷해요. 하지만 저희 발레단은 결코 누가 더 높이 뛰는지, 누구의 몸과 비율이 가장 예쁜지로 승부가 나는 곳이 아녜요.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고유의 매력, 타고난 아우라가 반드시 필요하죠. 제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외려 맘이 편해요. 그저 당장 주역이 주어질 때 춤 출 수 있어서 행복할 뿐이죠.”
300여명의 단원중 대다수는 맨 아래 카드리유(군무) 단계에서 42세 정년으로 무용수의 삶을 마무리한다. 제가 주역을 맡을 때 제 뒤로 10살도 더 많은 동료들이 너무나 열정적으로 군무에 임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걸 느껴요.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은 빛나는 에투알(수석무용수)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죠. 안주할 틈 없이 제 안의 불씨를 계속 타오르게 해주는 파리오페라발레를 전 너무나 사랑해요.”
세계 정상급 댄서가 된 그는 사실 남들보다 훨씬 늦은 중학교 1학년 나이에 발레를 처음 제대로 배웠다. 춤은 타고난 운명이었다. 그에게 ‘당신에게 춤이란 무엇인가를 묻자 잠시 곰곰히 생각에 잠긴 후 찬찬히 말했다. 항상 같은 맘이라 하면 거짓말이겠죠. 어떨 땐 돈 벌기 위한 생존수단이고, 어떨 땐 제 인생 최고의 찬스 같고…. 무엇보다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고 행복해하는 것이란 건 분명해요.”
박세은은 오는 8월 12~13일 간만에 국내 무대에 선다. 국립극장서 열릴 예정인 서울국제무용콩쿠르 갈라 공연에서 루돌프 누레예프 버전의 '신데렐라' 파드되 등을 선보인다. 자연스럽게 수년 전 국내 무대에서 자주 호흡을 맞췄던 파트너이자 절친한 동생인 김기민으로 주제가 흘렀다. 김기민은 지난달 최고 권위의 무용상 '브누아 드 라 당스'를 받았다.
"제가 중1 때 '나도 형처럼 세은 누나랑 춤 춰보는 게 소원'이라던 초등학생 꼬마가 어느새 세계를 누비는 댄서가 됐네요. 수상은 당연한 결과라 놀라지 않았죠, 하하."
[파리 = 오신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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