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여년 로마 역사상 최초의 여성시장이 탄생했다.
비르지니아 라지(37) 오성운동(M5S) 후보는 19일(현지시간) 67%에 달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집권 여당 민주당(DP) 후보를 꺽고 이탈리아 수도 로마의 새시장으로 당선됐다. 정치 경력이 일천한 30대 여성정치인 라지 오성운동당 후보가 로마 시장으로 당선되면서 이탈리아 정치 지형은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요구가 들불처럼 번지면서 요동을 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09년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가 부패에 찌든 기존 정당을 부정하며 ‘정직을 기치로 내걸고 창당한 오성운동은 라지 후보를 로마 첫여성 시장으로 탄생시키면서 제 1야당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게됐다.
라지의 당선은 좌·우 진영을 가릴 것 없이 기성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환멸이 얼마나 큰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일대 정치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라지 당선인은 지난 2011년 정계에 입문, 정치 경력이 5년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로마에서 나고 자란 ‘로마통이라는 점을 앞세워 생활밀착형 공약으로 유권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기성 정치인들처럼 거대 담론이나 올림픽 유치와 같은 초대형 공약 대신 열악한 교통 시스템, 도로 인프라 개선, 쓰레기 수거 문제 해결, 빈약한 교육 시스템 개선 등 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당장 체감할 수 있는 민생이슈를 꺼내들어 지지기반을 넓였다. 라지 당선인은 또 과거 인터뷰에서 자녀들을 위해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엄마의 마음으로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정계에 입문했다”며 여성으로서 포용력 있는 정치를 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라지 당선인은 19일(현지시간) 시장선거 결선투표 마감 직후 발표된 출구 조사에서 승리가 결정되자 남녀가 평등한 기회를 갖는 것이 여전히 어려운 시대에 로마에서 첫 여성 시장이 탄생했다”며 모든 로마시민들을 위한 시장이 되겠다”고 밝혔다. 라지 당선인은 또 지난 20년 간의 잘못된 시운영 방식을 폐기처분하고 합법적이고 투명한 시운영에 나설 것”이라며 부패 척결에 대한 의지도 거듭 밝혔다.
로마시는 2014년 발생한 시청 공무원과 마피아 결탁 의혹이 불거진뒤 마테오 렌치가 이끄는 민주당 소속 이그나지오 마리노 시장이 지난해 10월 사임한 뒤 8개월간 공석 상태였다. 시청 직원들이 마피아와 결탁해 예산을 유용한 것이 드러나면서 유권자들의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라지 당선인이 부패 척결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것도 이때문이다.
라지의 당선으로 창당 7년도 안 된 오성운동은 이탈리아 정계에서 상당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라지 후보 당선과 관련, 뉴욕타임스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기존 정당에 환멸을 느낀 유권자들이 오성운동을 향후 이탈리아 정계를 이끌어갈 정당으로 인식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분석했다. 라지 당선인도 유권자들이 우리를 대안으로 보는 것 같다”며 이제 유권자들은 오성운동을 단순한 반(反)체제 운동단체 정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여론의 반감을 사고 있는 기존 정당에 대한 거센 비판으로 반짝 여론의 지지를 얻는데서 벗어나 정권 교체를 할 수 있는 대안 정당으로서의 입지를 확보하게 됐다는 얘기다. 또 그동안 경제긴축을 반대하는 등 인기영합주의적(포퓰리즘)정책을 잇따라 내놓은 것도 오성운동 약진에 일조했다는 해석이다. 오성운동은 유럽연합(EU) 탈퇴와 조건없는 기본소득 보장, 무료 인터넷 서비스 제공 등 포퓰리즘 공약을 쏟아내 기존정치권으로부터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브렉시트 투표를 앞두고 이탈리아 국민들의 반난민정서도 활용했다는 지적이다.
새로운 역사를 쓴 라지 당선인과 오성운동 앞에 남겨진 과제도 적지 않다. 로마시 부채는 최소 130억유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중교통은 사실상 파산 일보직전이고 로마 거리 곳곳은 포트홀로 가득하다. 아직 마무리되지 못한 채 방치된 공공 공사도 많아 예산을 투입해야 할 곳이 한두곳이 아니다. 로마 시정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오성운동이 기존 정당에 비해 빈약한 조직력과 인재 부족을 어떻게 극복할 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한편 집권 민주당은 로마 시장에 이어 토리노 시장직까지 빼앗기면서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됐다. 특히 렌치 총리는 오는 10월로 예정된 상원 개혁 국민투표를 앞두고 입지가 크게 약화되면서 집권이후 최대 위기에 몰렸다.
[강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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