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사탕수수 농사를 지으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1033명의 조선인이 1905년 인천항에서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향해 배를 탄 것이 시작이었다.
항해 도중 일부가 사망하고 멕시코에 내린 조선인은 모두 1030명. 4년 후면 큰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생면부지 낯선 땅에서 땀흘려 일했지만 그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0여년이 지난 1921년, 먹고 살 길을 찾아 멕시코 각지로 뿔뿔이 흩어진 조선인들에게 독일인과 일본인이 접촉했고, 쿠바에 가면 새로운 살 길이 있다는 말에 288명이 쿠바로 향했다. 그 해 3월25일 쿠바 마나티 항구에 발을 디딘 것이 쿠바 한인의 시초다.
쿠바에 도착한 조선인 이민자들은 사탕수수 농장에 들어가 일자리를 구했지만 세계 설탕값이 폭락하면서 이내 자리를 잃고 방황하기에 이른다. 오도가도 못한 이들은 쿠바의 마탄사스 카르데나스 아바나 엘볼로 등의 도시에 정착했고, 사탕수수 대신 선인장의 일종인 에네켄 농사에 주로 종사했다. 마탄사스는 한인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지역이 됐다.
한인 특유의 근면성으로 생각보다 일찍 자리를 잡았으나 환경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에네켄 농장이 팔리면서 한인들은 다시 흩어졌고, 1940년 쿠바의 노동 국유화로 시민권자에게 일자리 우선권을 주면서 한인들은 한번 더 주변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와중에 1950년 엘볼로에서는 쿠바 최초의 한인회인 ‘대한인국민회가 설립돼 조국의 음식과 음악 등 전통과 문화를 복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공산화된 쿠바와 한국은 교류가 단절됐으며 현지 한인들도 멕시칸과 결혼하면서 점차 조국과 멀어져갔다. 특히 1959년생 이후부터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마저 찾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 현지의 평가다. 현재 쿠바의 한인들은 대부분 쿠바 국적의 한인 2세로 쿠바인으로 완전히 동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5년 사라졌던 한인회가 다시 세워지고 한글과 한국사 교육이 시작되면서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다. 현재 한인 인구는 1000여명에 이른다.
[워싱턴 = 이진명 특파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