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중년 남자들의 로망을 실현하다…`나는 자연인이다`가 주는 작은 휴식
입력 2016-05-12 14:59 
3050세대 남자들의 로망은 무엇일까? 24시간이 모자라게 바쁜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휴식이 필요하다. 그런 남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개그맨 윤택과 이승윤이다. 2012년부터 4년째 매주마다 자연 속 새로운 공간을 찾아, 그 속에서 동화되어 살아가는 자연인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이 사는 법을 배운다. 방송은 각자가 가진 마음 속 상처를 공유하고 함께 공감하며 소통하고자 한다.



190번째 자연인 박용준 씨의 육하원칙 인생기

▶Who 누가? | 자연인 박용준(65) 씨는 산에서 두 번째 인생을 보내기 위해 오래 시간 준비를 해왔다. 그는 도시에 살면서 ‘언젠가는 자연으로 떠나야지라는 준비를 늘 하고 있을 정도로 마음만은 ‘산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When 언제? | 20여 년 전, 박용준 자연인은 노후에 살 곳을 찾아 전국의 모든 산을 떠돌았다고 한다. 그가 지금의 안식처를 얻기까지 20년의 세월을 공들였다.



▶Where 어디서? | 고즈넉한 호숫가 옆에 자리하고 있는 자연인의 집. 자연인은 우연히 낚시를 하러 왔다가 이곳 경치에 한 눈에 반하게 됐다. 이후 퇴직과 동시에 지금의 집터를 구입해 살게 됐다는데. 그는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살려 집을 짓기 위해 3개월 동안 집터 근처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자연인은 흐르는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를 음악 삼아 듣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이야기 한다. 집 주변에는 돌나물, 곰취, 돌미나리, 삼채나물 등 지금 이때만 맛볼 수 있는 봄나물이 가득해 언제든 봄의 맛을 느낄 수 있다.



▶What 무엇을? | 어떤 틀에도 갇힘 없이 그저 내 식대로 살고 싶을 뿐입니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걸 보면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박용준 자연인



▶How 어떻게? | 박용준 자연인은 밭에 있는 황토를 이용해 손수 벽돌을 찍어낸다. 벽돌 1900장을 손수 찍어 집을 짓는가 하면 계곡 위에 아기자기한 쉼터를 꾸미기도 했다. 그의 집 마당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폐천막과 패널로 만든 작은 연못이다. 산에 들어와 영양 보충이 필요할 때마다 추어탕을 끓여 먹다 보니 아예 연못을 만들어 미꾸라지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라고. 현재 연못 안에는 논에서 잡아온 미꾸라지가 가득하다. 보양식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저장고나 다름없는 셈이다. 이처럼 자연인은 집 곳곳에 노력과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있다.



박용준 자연인은 40여 년간의 공직생활 동안 머릿속에는 드넓은 자연으로 돌아가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때문에 그는 살아갈 터전에만 신경을 쓴 게 아니라 체력관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0년 전부터 배운 ‘국궁은 자연인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는 최고의 건강 비결로 통한다는데. 언뜻 보기에 큰 움직임이 없어 보이지만 활시위를 놓을 때 조금의 움직임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온 몸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해야 하고 유연성 역시 필수다. 그 어떤 스포츠보다 뛰어난 전신운동법인 것. 뿐만 아니라 집중력이 길러지고 멀리 있는 과녁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시력도 좋아진다. 자연인은 화살을 보관하는 보관대부터 표적, 화살을 쏘는 난간까지 자신만의 국궁장을 직접 만들어 매일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이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산짐승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 다녀야 뭐든 쏠쏠한 재미를 볼 수 있어서 일부러 길이 나있지 않은 산만 다닌다는 자연인. 봄을 알리는 두릅과 고사리, 다래순을 맛보고 후손에게 풍요로운 자연을 물려주기 위해 주변 산을 돌아다니며 나무를 심고 다닌다.



▶Why 왜? | 한평생 틀에 박힌 삶을 살아온 자연인. 그는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학교 대신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며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또래 친구들보다 한 해 늦게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대물림 되는 가난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악착같이 공부를 했다. 그리고 20세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서 든든한 집안의 기둥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공직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일단 취직만 되면 탄탄대로를 걸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현실은 많이 달랐던 것. 1970년대 당시 어려운 사람의 생계지원을 하는 업무를 했던 자연인은 연고지 없이 떠돌다 사망하는 사람들을 직접 처리하고 매장하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참담한 죽음과 마주해야 했다. 심지어 시체를 매장하기 전 검사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시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루 꼬박 시체 옆을 지키는 일도 해야 했다. 불법 건축물 감사 업무를 할 때는 투기꾼들이 뇌물을 보내며 눈을 감아달라는 검은 유혹의 손길들도 많았다. 이를 거절할 때마다 집을 폭파한다느니 자식들을 죽이겠다느니 하는 생명의 위협을 가하는 협박이 셀 수 없이 많아졌고, 자연 속 삶에 대한 열망은 커져갔다.

삶의 무게를 버티고 자연인으로서 시작한 새 삶

자연에 몸을 뉘이기 전, 농업직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던 박용준 씨. 하지만 점차 농업분야가 쇠퇴하면서 농업직 인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 줄어들었고, 덩달아 진급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함께 일을 시작했던 동료들은 승승장구하는 동안 홀로 도태되는 쓴맛을 봐야 했다는데. 우여곡절 끝에 말년에는 동장을 역임했지만 직급이 높아질수록 책임감은 커져만 갔다.

3만 여명 주민들을 책임지는 역할이 되면서 비나 눈이 오면 사고는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날로 늘어만 갔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덩달아 불면의 나날을 보내야 했을 정도로 40여 년 간의 공직 생활을 하면서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는데. 그럼에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바로 아내와 두 아들, 가족 때문이었다. 가장의 책임은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죽을힘을 다해 버텨온 용준 씨. 정년을 2년 앞둔 어느 날, 그는 명예퇴직을 결심하고 뒤도 안 보고 산의 품에 안겼다. 자연의 한 없이 넓은 어깨에 평생 기대어 살고 싶은 박용준 자연인의 일상은 MBN 공식 홈페이지에서 다시 보기 서비스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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