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국회를 이끌어갈 각 당의 원내대표가 확정됐다. 일약 제1당 위치에 오른 더불어민주당 당선자들은 운동권 출신이자 86그룹의 리더격인 우상호 의원을 택했다. 원내 제2당으로 전락한 새누리당의 선택은 더욱 극적이다. 현역 의원이 아닌데다 충청권 비주류인 정진석 당선자를 소방수로 택한 것.
여소야대이자 교섭단체 정당이 3곳인 20대 국회에서 ‘협치(協治)는 이제 변수가 아닌 상수다. 각각 DJ(김대중)와 JP(김종필)에게 정치를 배웠고, 본능적으로 특정 ‘계파와 거리를 두며 정치를 해온 두 사람이 원내 사령탑에 오른 것은 우연만은 아닌 듯 하다. 게다가 이들 사이엔 노회한 ‘정치 고수 박지원 의원이 있다.
우상호·정진석·박지원. 이질적 조합이지만 정치의 묘미는 반전에 있다. 인터뷰를 하면서 시쳇말로 꽤 괜찮은 ‘케미를 보여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찾아들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이보다 더 화려한 컴백이 있을까. 정진석 새누리당 신임 원내대표는 이달 29일까지는 국회의원이 아니다. 원외(院外) 신분으로 원내(院內) 사령탑인 ‘플로어 리더에 오른 것은 해외에선 전무하고, 국내에서도 전례가 떠오르지 않는 ‘사건이다. ‘시(時)와 ‘운(運)이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기도 했지만 준비된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정 원내대표는 8일 매일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그가 그리는 새로운 정치의 조감도를 열정적으로 풀어냈다.
정 원내대표는 선친인 고 정석모 의원이 15대 국회를 마칠 무렵 와병하자 바통을 이어받아 같은 지역구(충남 공주)에 출마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달변가인 정 원내대표에게 남긴 선친의 유훈은 하고 싶은 말의 65%만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선친은 경찰 공직을 거쳐 6선 의원을 하면서 한번도 구설에 오르지 않은 분”이라며 언행이 신중해야 한다, 서두르지 말라는 말을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다. 사실 제 약점을 잘 아시고 지적하신 얘기”라고 했다.
그는 상대를 압도하는 체격(키 183cm, 체중 95kg)뿐 아니라 힘도 장사다. 팔씨름에서 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달변에 거구. 언뜻 삼국지 속 장익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장비보다는 관우이고 싶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여소야대 속 ‘협치를 내세워 당선된 정 원내대표에게 그만의 정치 철학을 물었더니 사다리 정치”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중앙와 지방, 좌와 우를 연결하는 정치를 뜻한다. 나는 중도 색채의 정치인이고, 편견이 없다”고 부연했다.
그가 여야, 계파를 넘나들며 수백명의 ‘형님·동생을 보유한 사통팔달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정 원내대표는 어릴 적 선친이 지방을 옮겨다닐 때 형과 누나는 할머니에게 맡기고 막내인 나만 데리고 다녔다”며 전남 광주와 부산에도 살았고 중학교는 춘천과 대전에서 다녔다. 지금도 친구가 영호남 반반씩”이라고 말했다. 이어 서울에 올라와 보성고, 고려대를 나왔다. 제주도 말고 안 살아본 데가 없다는 얘기가 허풍이 아니다.
정치 행로도 스스로 ‘경계를 두지 않고 다양성을 추구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부 기자를 하며 정치를 ‘비판했고, 3선 의원으로 ‘실천했고, 정무수석을 하며 ‘조율했다”며 또 국회 사무총장은 ‘지원이었다. 그 과정에서 역지사지를 배웠다”고 했다. 정 원내대표는 20대 총선은 통섭과 협치를 하라는 국민의 지상명령이었다”면서 국민들이 절묘한 정치질서를 만들어줬으니 이제 대화와 타협으로 지긋지긋한 대결정치를 종식시켜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이어 좌우명인 화이부동(和而不同)도 두루 섭렵해 친하게 지내되 중심을 잡는다는 뜻”이라며 나는 이명박 정부에서 정무수석을 했지만 친이가 아니고,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했지만 친박도 아니었다. JP 모임을 빼면 어떤 계파 모임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주제가 JP로 옮겨가자 ‘65% 룰이 잠시 깨진 듯 했다. 그는 당선 다음날 JP에게 감사 전화를 했다며 JP 문하생으로 정치를 시작하면서 배운 것이 바로 여백의 정치다. 권력을 나눠야 국민이 편안하다, 항상 나눌 준비를 하고 정치를 하라고 배웠다”고 전했다. 이어 보수의 상징 JP와 진보의 상징 DJ가 DJP연합을 한 것이 바로 협치의 효시다. 지금이야말로 JP의 리더십을 곱씹어봐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때 JP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가벼운 신경전(?)을 벌였던 이완구 전 총리에 이어 1년여 만에 충청권 출신으로서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가 됐다. 정 원내대표는 중부권 사람들은 균형감각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기질적 특성이 있다”며 한국 정치 후진성의 한 요인인 영호남 패권경쟁을 순화시키려면 중부권 목소리가 좀 더 커질 필요가 있고, 내가 정치적 언덕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에둘러 말했다.
충청권 대망론의 또 다른 주인공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도 교분이 있을까.
그는 반 총장 이름이 신문 1면에 처음 나온 것이 내가 쓴 특종 기사였다”고 말했다. 1994년 말 미군 헬기가 북한에 불시착해 미군이 포로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 원내대표는 1면 톱 제목이 ‘바비 홀 준위 오늘 귀환이었고 부제가 ‘반기문 정무공사, 미 국무부와 협의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반기문 대망론에 대해 직접적 언급을 피했지만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답변이었다.
그는 마당발답게 20대 국회를 주도할 여야 리더들과도 두루 교분이 깊다. 워싱턴 특파원일 때 박지원 국민의당 차기 원내대표와 만나 여태껏 호형호제하며 지낸다. 김종인 더민주 비대위 대표와는 그가 이명박 정부때 정무수석 영입 제안을 받고 거취를 상의할 정도로 친분이 있다. 그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에 대해서도 협치는 곧 융합 아닌가. 융합 전문가인 안 대표가 협치를 잘 소화할 것으로 본다”고 호평했다.
정 원내대표는 끝으로 한국 정치를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는다”며 야당도 발목잡기나 네거티브로 흐르면 수권 정당이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이제 협치를 원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어떤 그릇에 담을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다행히 좋은 파트너들을 만났다”며 우상호 더민주 원내대표도 합리적인 분이라고 들었다. 이 정도면 퀄리티 스타트”라고 또 한번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1987년 여름 서울시청 앞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고 이한열 민주화열사의 장례식이 열렸다.
이 열사의 영정사진을 들고, 뜨거웠던 그해 여름의 한복판에 섰던 인물이 바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신임 원내대표다.
우 원내대표 사무실에는 지금도 이 열사의 영정이 걸려 있다. 지난 총선 유세에는 이 열사의 모친인 배은심 여사와 연세대 운동권 후배인 영화배우 안내상·우현 씨가 함께 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 원내대표는 운동권 ‘전사(戰士)에서 제1당 원내대표로 훌쩍 성장해 한국 정치의 한복판에 다시 섰다. 그는 다른 운동권 출신들과 달리 파벌 지향과 거리가 먼데다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다.
지난해 말 야당이 분당 위기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탈당파인 김한길 전 대표에 대한 비난이 폭주하자 그는 김 선배는 내년 총선에서 야권 지형 재편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라며 옹호했다. 비난 여론에 편승하지 않고 수도권 의원들과 함께 대안을 마련했다. 문재인 전 대표가 사퇴하고 비상대책위 체제로 가자는 것이 중재안의 골자였다. 결국 문 전 대표도 이를 받아들여 김종인 대표 영입과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이라는 성과를 냈고, 총선 승리의 기폭제가 됐다. 그의 조정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합리적 품성과 대안 제시 능력은 원내대표 경선 결선투표에서 비주류 표심이 그에게 쏠린 뒷배경이 됐다.
지난 5일 매일경제와 만난 우 원내대표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탄 듯 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면서 그러나 결국 소통과 조화가 중시되는 때가 오니 계파가 없는 나를 원내대표로 선출한 것 아니겠느냐”고 자평했다.
우 원내대표는 원내대표 첫 도전에서 당선을 거머쥐었다. 유난히 ‘야심가가 많은 야당에서 한 번에 원내대표에 당선된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 2012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경선에서도 첫번째 도전에서 당선됐다. 특정 계파에 소속되지 않은 우 원내대표의 연이은 승전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계파에 소속돼야 생존을 보장받고, 정치적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는 정치판의 불문율을 깨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젊은 피 수혈때 정치권에 첫발을 내디뎠다. 1987년 연세대 총학생회장과 전대협 부의장을 지낸 우 원내대표는 당시 함께 영입된 이인영·오영식 의원, 임종석 전 의원 등과 함께 ‘86그룹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그러나 정치권에 입문한 이후 행보는 달랐다. 이인영 의원은 고 김근태 의원의 적자로서 민주평화국민연대에 소속됐고, 오영식 19대 의원은 정세균계에 합류했다. 임종석 전 의원은 대표적인 ‘박원순 키즈가 됐다. 그러나 우 원내대표만큼은 끝까지 특정 계파에 소속되지 않았다. 우 원내대표는 집권하겠다는 정당이 집안싸움을 하고 있으니 나라를 맡기고 싶겠느냐”면서 저는 절대 개인전을 안 하겠다. 내부의 단합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우 원내대표의 당선은 지금까지 변방에서 참모 역할을 머물렀던 ‘86그룹이 전면에 나선다는 정치적 의미도 크다. 우 원내대표 스스로도 새로운 세대의 전면 등장”이라고 표현했다. 새로운 세대답게 소통 방식도 파격적이다. 그는 원내 부대표단 인선을 직접 정론관(국회 기자회견장)에 내려와 마이크를 잡고 설명했다. 원내대표가 부대표단 인선을 직접 설명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우 원내대표는제가 임명한 사람들을 소개하는데 직접 내려와야 하는 것 아니냐.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웃으며 앞으로 언론과 소통을 강화하겠다. 젊은 원내대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러한 변화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우 원내대표는 동료 의원과도 발로 찾아가는 소통을 지향한다. 최근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에 의료 분야를 포함시키자고 제안했던 최운열 당선자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내가 직접 최 당선자를 찾아갔다”면서 최 당선자가 지난 3년에 걸친 서비스법 논의의 히스토리를 전혀 모르고 있어 소상히 설명해 줬다”고 말했다.
그의 당선으로 당권 도전에 나설 것으로 알려진 다른 ‘86그룹들에게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송영길 의원 등이 당권 도전에 나선다면 다른 당권주자들이 나와 경력이 겹친다고 공격할 것”이라면서 그러나 세대교체 바람으로 뛰어넘는다면 승기를 잡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정청래 19대 의원의 당권 도전에 대해선 정 의원과 최근 만났는데 당권 도전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더라”면서 그러나 나오지 않는 것이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당선된 뒤 문재인 전 대표, 손학규 전 고문, 최문순 강원지사, 권노갑 전 고문,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 등 다양한 정치권 선배들과 인사를 나눴다고 한다. 그는 원내대표에 당선됐더니 다 전화를 잘 받더라”면서 문재인 전 대표와 손학규 전 고문은 기뻐하면서 열심히 해보라는 덕담을 건냈다”고 전했다.
이어 최문순 지사는 강원도 출신 원내대표가 나와 예산 확보가 수월해진 것 같다며 반기더라”면서 권노갑 전 고문은 자신이 정치권 영입에 관여했기 때문인지 마치 ‘내 새끼가 잘 된 것 마냥 기뻐하셨다”고 껄껄 웃었다.
[박승철 기자 / 신헌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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