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어느 순간 엄마] (17)육아용품 ‘아나바다’ 하는 즐거움
입력 2016-04-15 17:53  | 수정 2016-05-12 15:26

20대 국회의원 선거날, 난 비록 지지하는 후보가 떨어졌지만 횡재 한 가지를 했다. 무려 39개의 기저귀를 득템 한 것이다. 투표를 마치고 떡하니 나오니 한 아주머니께서 쭈빗쭈빗 다가오신다. 저기요”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처 날 부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기, 기저귀 쓰시나요?”라는 말에 귀가 번뜩! 뒤돌아보니 인상 좋게 생기신 아주머니께서 기저귀 한 박스를 들고 계셨다.
아이 돌보는 일을 한다는 아주머니는 해당 집의 아이가 기저귀를 더 이상 쓰지 않게 돼 누군가를 주기 위해 투표 장소에 기저귀를 가지고 나오셨다고 했다. 원래는 40개 들이였는데 하나는 썼다며, 그래도 새 것이나 다름없으니 쓰겠냐고 물어보시는 아주머니께 난 그럼요, 너무 잘 쓸게요”라고 손부터 뻗었다. 돌쟁이 아이를 안고 나온 투표장에서 아주머니가 건넨 뜻밖의 선물은 먼나라 얘기와 같은 정치보다 훨씬 날 더 기쁘게 했다.
꼭 ‘공짜라서 기뻤던 것은 아니다. 본래 내 성격이 공짜를 좋아하질 않는다. 남에게 무엇인가를 얻으면 (아무리 그 상대방에게는 불필요한 물건이라도) 다시 갚아야한다는 빚진 마음이 싫어서다. 그래서 남에게 신세 질 일을 아예 만들지 않는 편이다. 육아 초기에 이런 아주머니를 만났다면 거절했을지 모르겠다. ‘왜 준다는거지? 뭐가 잘 못된 것은 아닐까?,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런지, 내가 뭘 해줘야하지? 등 의문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채 말이다.
하지만 14개월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난, 생판 모르는 아주머니라도 육아라는 공통분모 하나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더 냉큼 받았다. 그냥 버릴 수도 있었을텐데, 투표 장소까지 챙겨나와 아이를 안고 오는 엄마들만을 기다렸을 아주머니의 마음이 참 예뻤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란 말을 줄여 만든 ‘아나바다. IMF를 겪으며 한 때 유행한 아나바다 운동을 나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체감하고 있다. 지금 성호가 입는 옷, 신발, 모자, 매일 가지고 노는 장난감과 여러 책, 카시트 등 대부분은 남들에게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새 것은 아니지만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 하나만으로, 출산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돌을 맞이했다는 기념으로 건네받은 이 선물들은 도무지 값을 매기기가 어렵다. 육아를 하며 아껴 쓰고, 어려운 와중에 남과 나누려 하고, 지금 당장 필요한 사람이 더 요긴하게 쓸 수 있게까지 한 아나바다 운동의 결정체여서다.
첫 아이를 가진 난 육아용품 하나하나를 새로 사기 바빴다. 하지만 이내 새 것만을 고집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이 앞에 비싸게 주고 산 옷은 정말로 얼마 입지 못하고 옷장 속에 고이 간직하게 돼서다. 아무리 좋은 장난감을 사 줘도 며칠 뒤면 아이는 싫증을 내고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찾았다. 발육을 도와주는 아기 체육관과 같은 놀이기구는 왜 그렇게 부피가 큰지, 2~3개만 마루에 놔둬도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남들이 산다기에 나도 따라 사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점차 커졌다.
그럴 때 친구나 육아 선배들이 건네주는 옷과 장난감들이 얼마나 요긴하던지. 선물받을 당시에는 언제 입힐 수 있을까 생각했던 넉넉한 사이즈의 옷도 쑥쑥 자라는 아이 덕분에 어느 새 꺼내 입으며 옷맵시를 자랑했고, 한 계절 앞서 받은 옷들은 옷 걱정없이 제 계절을 나게 도왔으며, 늘 새로운 장난감을 찾는 아이에게 잊을 만할 때쯤 꺼내보이는 헌 장난감들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받기가 참 어려웠다. 미안해서다. 또래보다 결혼이 늦었던 탓에 난 친구나 선배들의 출산 소식을 들어도 축하 인사만 전했을 뿐, 뭐하나 건넨 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육아를 경험했다는 이유만으로 엄마가 된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이들이어서 더욱 미안했다.
빚진 마음에 이들에게 필요한 물건은 없는 지 주변을 돌아보게 됐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 역시 아나바다 운동에 동참할 수 있었다. 비단 아기용품 뿐 아니라 그릇, 가방 등 일상의 용품까지 확장해 나보다 더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됐다.
미안함은 덜고, 베풀고 난 뒤 내 마음은 한층 풍성해졌다. 헌 것이라도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노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아가씨 때는 미처 몰랐던 기쁨이다. 특히 엄마와 육아라는 공통분모로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헤아리다보면, 육아의 어려움을 쉽게 나눌 수 있어 더욱 좋다. 내 아이가 쓰던 물건을 공유하다보니 엄마들 사이 이야기꺼리가 늘게 되고 이런 저런 속깊은 얘기가 오갈 수 있다.
내 돈 들여 산, 또 내 아이의 체취가 남아있는 물건들을 나눠쓰고, 바꿔쓰는 일이 쉽지는 않다. 챙겨서 주는 일이 귀찮기도 하고, 어쩐지 남이 쓰던 물건을 쓰려니 찜찜할 때도 있다. 하지만 ‘아나바다가 주는 즐거움이 훨씬 크기에 육아맘들에게 강추한다. 경제적 부담은 덜면서 엄마들 사이를 더욱 돈독하게 할 수 있는 아나바다 운동에 풍덩 빠져보시기를. 아이도 분명 이런 엄마를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디지털뉴스국 방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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