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골프장에 단 한 번 간후 "분수 안맞다"…연구원들과는 늘 소통
입력 2016-04-06 17:34 

서울 신설동에 위치한 낡은 대상그룹 본사 건물은 검소한 고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회장을 닮았다. 1973년 준공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외관을 바꾸지 않았다. 연간 매출액 3조원대를 올리는 굴지의 대기업이지만 겉치레가 없다.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았지만 그 흔한 사서도 편찬하지 않았다.
고인은 생전에 지방 출장을 갈 때 호텔 등 고급 숙소에는 일절 묵지 않았다. 승용차보다도 대중교통을 더 많이 애용해 아내 고 박하경 여사가 아침마다 토큰 두 개를 출근하는 남편 양복에 넣어줬다고 한다. 남대문 시장 설렁탕을 즐겨먹었던 고인은 골프장에 단 한번 간 후 분수에 맞지 않다”며 발을 들이지 않았다. 임원들이 선물한 벤츠 승용차를 시승도 해보지 않고 환불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임 창업회장은 1920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이리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스무살에 고창군청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해방 이후에는 피혁공장을 운영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직후 복구사업이 시작되면서 무역업으로 전환한 그는 이 일로 일본을 자주 오가면서 현지 조미료인 ‘아지노모토를 처음 접하게 된다. 이것이 미원 개발을 촉발시켰다.
당시 아지노모토는 별다른 경쟁 상대가 없을 정도로 조미료 분야 최강자로 우리 식탁을 점령하고 있었다. 임 창업회장은 순수 국산 조미료를 개발하기로 결심했고 단순한 경영자가 아닌 연구가로 변신한다.

그는 1955년 무역업을 접고 조미료 제조공법을 직접 익히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1년간 연구 끝에 부산으로 돌아와 495㎡(150평) 남짓 작은 규모의 국내 첫 조미료 공장을 세우고 동아화성공업주식회사를 창업했다. 여기서 1956년 국내 1호 조미료 미원이 탄생한다. 미원 탄생의 직접적인 과정은 지금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글루탐산 나트륨(MSG)인 점은 ‘아지토모토와 같다. 다만 미원(味元)은 맛의 으뜸, 최고의 맛을 내는 조미료라는 의미로 맛(味)의 근원(素)을 의미하는 아지토모토(味の素)와 미묘하게 다르다.
생산 초기 어떤 음식이든 ‘미원을 조금씩 넣으면 맛이 좋아진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미원을 사용하지 않는 가정이 없을 정도였다. 주부들에게 ‘맛의 비밀 ‘마법의 가루로 불리며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당대 최고 인기 여배우들을 모델로 내세워 화제가 됐으며, 가장 인기 있는 명절 선물이었다. 지금도 미원은 국내 발효 조미료 시장에서 95%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1969년에는 삼성 ‘미풍과 신한제분 ‘맛나니 등이 연합전선을 구축해 1등인 미원을 내리누르기 위해 외상판매와 덤핑행사 등의 공격을 퍼부어 ‘1차 조미료 대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같은 전략으로 대응하던 미원이 자금 여력이 나빠져 도산 위기에 처하자 임 창업회장은 오히려 제품 가격을 올리고 현금 결제만 받겠다는 ‘결단을 내린다.
덤핑과 외상 전쟁이 일반 소비자가 아닌 중간 도매상의 이익만을 위한 전략이라 더이상 따라갈 필요가 없다는 게 임 창업회장의 판단이었다.경쟁사보다 더 좋은 제품을 ‘더 높은 가격을 받으며 시장 질서를 바로 잡자는 임 회장의 결단은 효력을 발휘했다.
1960~70년대 미원으로 국내 조미료 시장을 석권한 그는 1987년 장남 임창욱 명예회장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1997년 전문경영인인 고두모 씨가 임창욱 명예회장 뒤를 이었고 그 해 세원과 합병한 미원은 사명을 대상으로 바꾸게 된다. 경영 일선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욕심 내지도 않는다 점 역시 임대홍 창업주와 임창욱 명예회장의 닮은 꼴인 셈이다.
경영에서는 완전히 손을 뗐지만 실험과 연구의 끈은 놓지 않았던 임대홍 창업회장은 2000년대 초까지 서울 신설동 대상 사옥 뒤에 연구실을 두고 전통 장류를 포함한 식품 연구를 계속했다. 건강기능상품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대상 클로렐라도 고인이 퇴임 후인 90년대 초반 당뇨병 치료차 복용하다가 제품화 아이디어를 낸 제품 중 하나다.
대상 관계자는 식품 전반에 관심이 많아 경영진과는 일절 소통이 없었지만 실험실 연구원과 엔지니어들에게는 최근까지 직접 연락해 전통 장류 등에 대한 신제품 아이디어를 전달하셨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상 관계자는 창업주께서는 직책을 가리지 않고 담당 연구원들에게 불쑥 전화하셔서 아이디어를 전달하고 의견도 묻곤 하셨다”고 떠올렸다.
고인의 좌우명은 논어 이인 편에 나오는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였다. 나는 오로지 나의 길을 간다는 뜻으로,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일관된 경영철학을 가져가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발효박사로, 대상그룹을 일본의 아지노모도, 미국의 ADM과 더불어 세계 발효시장의 3대 메이커로 부상시킨 장본인이였지만, 그는 국민 조미료였던 미원이 ‘MSG 유해성 논란을 겪을때에는 마음고생이 적지않았다고 한다. 재계의 한 지인은 고인이 그나마 최근 몇년새 유해성논란을 벗고 ‘미원 르네상스프로젝트를 진행할 만큼 최근 수년간 소매점 판매량이 증가하고, 해외 수출도 큰 폭으로 늘어나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모습을 지켜보고 세상을 뜨셔서 다행” 이라고 소회를 말했다.
대상그룹은 현재 국내 20개, 해외 28개 등 총 48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지주회사인 대상홀딩스가 정점에 있고 그 아래에 대상(주)를 비롯한 기타 계열사가 포진해 있다. 물론 핵심은 대상(주)다. 종합 식품브랜드인 청정원과 함께 미원을 생산하는 법인이 바로 대상(주)다.
대상(주) 아래에는 대상FNF(종가집 김치), 복음자리(잼), 대상베스트코(식자재 도매), 초록마을(유기농 전문매장) 등 다수 계열사가 있다. 대상(주)와는 별도로 대상홀딩스 지배를 받는 계열사로는 IT업체 대상정보기술과 광고기획사인 상암커뮤니케이션즈, 건설사 동서건설 등이 있다. 지난해 이들 계열사를 모두 아우른 대상그룹 매출은 3조500억원에 이른다.
창업회장의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8일 오전 7시다. 장지는 임 창업회장 고향인 전북 정읍 선영으로 정해졌다.
[전지현 기자 / 서진우 기자 / 이새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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