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묵을수록 임대료 뛰는 골목길 상가
입력 2016-04-04 17:15  | 수정 2016-04-05 10:14
건물이 오래될수록 임대료가 비싼 대표적인 이면도로 상권인 가로수길 상가. [매경DB]
서울 강남 최고 '핫(hot) 플레이스'인 도산대로변에 나란히 붙어 있는 청담동 53 소재 A빌딩과 52 소재 B빌딩. 위치는 거의 같지만 1층 상가 3.3㎡당 월 임대료는 각각 89만원과 10만원으로 9배 가까이 차이 난다. A빌딩은 지은 지 8년밖에 안 된 반면 B빌딩은 무려 31년이나 지난 탓에 감가상각분이 반영된 결과다. 보증금도 A빌딩이 10배 가까이 비싸다.
하지만 골목길로 눈을 돌리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청담 사거리에서 두 블록 안쪽에 있는 준공 41년차인 청담동 97 C빌딩의 1층짜리 상가를 빌리려면 3.3㎡당 40만원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직선거리로 고작 200m 남짓인 명품거리 골목길 81에 있는 지은 지 6년짜리 D빌딩 임대료 13만원보다 3배 더 높은 것이다.
묵을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와인만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지은 지 오래될수록 건물 시설 노후화 탓에 값이 곤두박질치는 대로변 상가와 달리 골목상권에 속하는 이면도로 상가는 오히려 젊은 빌딩보다 임대료가 더 비싸기 때문이다.
4일 상업용부동산 전문업체 NAI프라퍼트리가 강남구 소재 200여 개 빌딩을 표본 삼아 건물 건축 연한과 전용면적 3.3㎡당 1층 상가 임대료를 조사한 결과 이면도로에서는 건축 연한과 임대료가 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지은 지 오래된 이면도로 빌딩 임대료는 같은 조건의 강남구 전체 빌딩을 훌쩍 뛰어넘었다. 4월 현재를 기준으로 조사한 청담·역삼·신사·삼성·대치동 이면 빌딩의 1층 상가 3.3㎡당 평균 임대료는 15만원. 지은 지 27년 된 역삼동 832 상가 건물 임대료는 24만원으로 이보다 37% 비싸다. 그보다 더 오래된 41년짜리 청담동 97 빌딩 임대료는 40만원으로 평균 대비 배 이상 차이가 난다.
반면 건축 연한이 10년 미만인 '젊은' 빌딩들은 최저 6만원대로 평균보다도 최고 38%나 낮을 만큼 상대적으로 저가에 임차인을 들였다. 이는 지은 지 2~8년짜리 빌딩이 평균보다 최고 3배 더 비싼 임대료를 받는 대신 20년이 넘어간 곳은 평균의 40% 수준까지 임대료가 떨어지는 대로변과는 180도 다른 결과다.
입지가 사실상 같을 때 임대료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건물 노후도다. 감가상각을 무시할 수 없어서인데, 이 때문에 낡은 건물이 오히려 비싼 임대료의 척도가 되는 이면도로 상가시장 현황은 일반적인 상식을 뒤집는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대로변과는 완전히 다른 이면상권만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다.
정은상 NAI프라퍼트리 연구원은 "강남 이면도로 빌딩은 상가 등 근생(근린생활)이 주 용도인 빌딩 비중이 72%로 45% 수준인 대로변보다 훨씬 높다"며 "지상 5층 이하 중소형 건물에 도보 상권을 겨냥한 소형 점포를 넣는 것이 대부분이다 보니 건물 노후도 등과는 상관없이 유동인구만이 임대료를 결정짓는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고 설명했다.
최소 15층 이상 고층 빌딩 위주인 대로변 빌딩은 중·상층부는 기업 사무실을 유치하고 저층에만 상가를 들인다. 그러다 보니 상가 주요 고객은 위층 오피스에 근무하는 임직원이다.
요즘처럼 기업 경기가 안 좋아 오피스 공실률이 치솟는 상황에서는 상가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오피스는 건물 감가상각에 예민하다.
수십 년간 강남을 고수했던 기업들이 새로 들어선 판교 오피스로 대거 본사를 옮긴 것도 이 때문이다. 오피스 경기가 고꾸라지면 대로변 상가도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도보 상권 중심인 이면도로 상가는 오히려 이색 맛집 같은 특이한 콘텐츠만 부각되면 굳이 그 지역 주민이 아니라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알아서 사람이 몰려든다.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최근 새롭게 뜨고 있는 성수동이 대표적이다.
건물이 오래됐다는 것은 그만큼 입소문을 오래 탔다는 뜻이라 인지도 면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최고 인기 스폿으로 인식된다. 낡은 인테리어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이면 상권인 성수동 A공인 관계자는 "젊은 세입자들이 일단 임차 계약을 맺으면 알아서 자기 돈을 들여 취향에 맞게 건물을 뜯어고친다"며 "인테리어만 바꾸는 게 아니라 증축까지 하다 보니 굳이 돈을 들이지 않아도 알아서 건물이 리모델링되는 효과를 본 건물주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노후도와 임대료가 비례하는 현상은 최근 젠트리피케이션이 가속화되는 서울 골목상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 연구원은 "시간에 따라 이면도로 상가 임대료가 뛰는 현상은 곧 중소형 상점이 퇴출되는 결과로 이어진다"며 "종로구 익선동 한옥마을처럼 골목상권은 아예 진입 업종을 제한하는 등 전략으로 상권을 보호하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태성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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