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어느 순간 엄마] (3)집으로 출근한다는 아빠들
입력 2015-11-10 17:52  | 수정 2016-03-04 13:52

‘달그락 달그락
밤 11시, 남편의 2라운드가 시작된다. 1라운드 회사 생활에 이어 8개월짜리 아기가 잠든 후 시작되는 2라운드 가정(?) 생활은 심야 설겆이와 함께다. 행여 애가 깰까봐 모든 그릇을 씻고 자리에 놓을 때마다 온 신경을 집중하다보니 피로도는 2배로 급상승한다.
여기에 아기를 돌봐주시는 선생님을 위해 다음날 식사를 미리 차리고, 때에 따라 빨래를 널고 와이셔츠를 다리는 일도 해야하는 남편. 밤 12시를 훌쩍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기 일쑤다.
저녁 식사를 한 직후 설겆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식사하는 동안 곱게 기다려주지만은 않은 아기를 달래려면 밥을 먹자마자 목욕에 나서야 한다. 요리를 한 흔적부터 먹은 흔적까지 부엌과 식탁에 고스란히 남긴 채 말이다.
물 빨리 받어, 애 울잖아” 온도가 이게 뭐야, 너무 뜨거워” 기저귀랑 로션 좀 갖다줘” 애 좀 잡아봐. 너무 움직여”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내 불평에도 묵묵히 할 일을 하는 남편은 운 좋게 아기가 일찍 잠이 든 날이면 TV를 보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푼다. 비록 아기가 깰까봐 소리 없이 화면만 보는 것이지만.

애 추우니까 빨리 차 빼 와”, 살살 좀 운전해. 덜컹거리잖아”, 집에 과일 떨어졌네. 사올래?” 바닥이 너무 더러워. 좀 닦아줘”
주말이라고 남편의 2라운드 일정에 예외가 생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이돌보미 선생님의 전문가 손길 없이 아마추어인 우리가 24시간 아기를 돌봐야 하는 탓에 그야말로 집안은 전쟁터를 방불케한다.
5분을 채 넘기지 못해 마룻바닥에 다시 널부러지는 장난감과 책들, 먹다남은 이유식 그릇과 젖병, 과일쥬스와 물 등이 흘러 반쯤 젖은 티셔츠며 휴지통으로 미처 가지 못한 기저귀까지 쌓여있는 육아 전쟁터 말이다.
이런 때일수록 집안 일은 오롯이 남편 몫이다. (남편이 집안일을 하는 동안 나는 놀고 있는 게 아니다. 쌀 한가마니는 못 들어도 10Kg에 육박하는 아기를 번쩍번쩍 들었다 내려놨다하며 이곳저곳 탐색하려는 아기를 뒤쫓아가기 바쁘다.)
일요일 밤 11시쯤 시계를 보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라고 황금같은 주말이 끝났음을 허탈해하는 남편은 ‘회사로 퇴근하고, 집으로 출근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다.
물론 처음부터 남편이 이랬던 것은 결코, 결코 아니다. 산후 조리를 친정에 가서 한 결과 남편은 아기가 태어난 후 100일 간 아기 옆에서 보초를 서야하는 ‘이등병 신세를 면했다.
서울에서 승용차로 4시간 정도 걸리는 친정에 남편은 2주에 한번씩 내려왔다. 하지만 당시 볼때마다 훌쩍 큰 아기를 보며 감탄사만 연발했을 뿐 아기를 어떻게 안을지도, 업을지도, 재울지도, 먹일지도 몰랐다. 장거리 운전을 하며 주말 이틀 짧은 시간 머무르는 남편에게 굳이 어려운 일을 시킬 필요가 있을까 싶어 애기 보는 일은 내가 전담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런 시간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을 줄이야. 막상 아기를 데리고 서울 집에 올라온 이후 우리 부부는 밤새 뒤척이고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서로 신경만 날카로워졌다.
친정에서 육아문제로 이미 겪은 시행착오를 더는 겪고 싶지 않았던 나는 남편을 마치 학생 가르치듯 다그쳤다. 내가 쌓은 육아 노하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남편 나름의 육아 방식을 존중하지 못했고 그 결과 말다툼을 빈번하게 했다. 행여 아기가 들을까봐 귀를 막은 채 다투는 모습이란.
가장 큰 문제는 독립적인 육아가 가능하게끔 남편을 만들겠다는 내 생각과 달리 아기를 혼자 돌보겠다는 남편에게 정작 아기를 맡기지 못한 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육아 지식이 남편이나 나나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는데, 3개월 먼저 육아에 뛰어들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잔소리만 늘어놓았다.
‘위기가 곧 기회란 말은 육아 문제로 고민하던 우리에게 통했다. 지난 9월 내가 회사에 복직한 후 야근이나 주말 당직을 설 때면 어찌할 도리없이 남편이 혼자 아기를 돌봐야했기 때문이다.
아빠가 애를 업은 것인지, 애가 아빠를 업은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아기띠가 어색하기만 했던 남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기와의 시간이 편안해보였다. 솔직히 겁이 난다며 한숨을 내쉬던 남편은 얼굴에 미소를 띠는 여유도 생겼다.
물론, 아기의 컨디션에 따라 난관에 부딪힌 남편이 회사에 있는 내게 문의(?) 전화를 걸어올 때도 여전히 많다. 하지만 엄마 없이 생후 8개월 아기를 4시간 이상 볼 정도면 꽤 훌륭한 아빠에 속한다고 칭찬하고, 그러한 칭찬에 남편은 자신감을 얻는다. ‘진작에 맡겨볼 걸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혼자 아기를 볼 기회가 생길수록 남편의 육아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뿐만 아니라,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한 남편은 우리만의 육아분담법을 먼저 제안했다. ‘육아는 내가, 집안일은 본인이 하는 것으로. 워킹맘으로서 남편의 지지가 절실한 상황에 이같은 남편의 지지는 거꾸로 나에게 육아에 대한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있다.
결혼 전 애를 둘은 낳아야한다고 너무나도 쉽게 말했던 남편은 최근 하나에만 집중하자”란 생각으로 바뀌었다. 자의든 타의든 육아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체감했다는 게 그 이유다. 옆에서 관조만 하는 육아와 몸소 뛰어들어 눈물콧물 쏙 빼는 육아는 이렇게 천양지차다. 오늘도 집으로 출근하는 아빠들, 웰컴 투 육아 세계다.
[디지털뉴스국 방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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