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17년만에 주인 찾은 테헤란로 20층 빌딩 사연
입력 2015-04-26 17:23 

서울 강남 시내 한복판을 동서로 가로 지르며 뻗은 테헤란로. 오랜 금융 중심지의 명성을 자랑하며 고층 빌딩들이 빽빽하게 자리잡은 이 곳에 철골 골조작업까지만 진행하고 멈춰선 20층짜리 건물이 생뚱맞게 서있다. 비싸기로 유명한 강남 노른자 땅에 어울리지 않는 이 ‘흉물은 벌써 17년 째 방치돼있다. 이미 오래전에 문닫고 사라진 회사인 ‘신한종금 사옥으로 불리는 건물이다. 그 오랜 세월 이 건물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주인을 찾지 못한 빌딩의 기구한 사연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대 초 단자회사에서 종합금융사로의 부상을 꿈꾸며 강남구 대치동에 신사옥을 짓기 시작한 신한종금은 공사가 채 절반도 진행되지 않은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무리하게 외화자금을 끌어들인 종금사들이 줄줄이 부실화됐는데, 신한종금의 자금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사옥 공사는 중단됐고, 그 해 10월 신한종금은 파산 선고를 받았다. 종금사의 몰락과 더불어 주인을 잃은 건물만 기괴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남았다.
신한종금의 파산관재인이 된 예금보험공사(이하 예보)는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2010년 5월 신한종금이 소유하고 있던 이 건물 지분을 덕원트레이딩에 매각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덕원트레이딩이 스톤건설에 합병되면서 스톤건설이 공사를 재추진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2012년 예상치 못한 저축은행 사태가 터졌다. 2011년부터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에 무분별하게 투자했던 저축은행들이 부동산 경기 침체로 줄줄이 부도났다. 덕원트레이딩도 신한종금 사옥 건물을 담보로 진흥·경기·한국·영남 등 4개 저축은행에서 780억원을 대출 받았다가 못갚고 있던 차였다. 이들 4개 저축은행도 부실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영업정지를 당해 예보의 수중에 들어왔다. 또한번 주인을 잃은 신한종금 사옥의 운명은 다시 예보의 손에 쥐어졌다.

구 신한종금 사옥이 주인을 찾지 못하고 방치된 사이 인근 삼성동 지역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2000년 무역센터에 코엑스몰이 개장하면서 삼성역 인근은 하루 평균 수십만 유동인구가 드나드는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비롯한 유명 국제 회의들을 유치하면서 국제적인 위상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신한종금 사옥의 시간은 여전히 17년 전에 멈춰있었다. 위치만 놓고보면 누구나 탐내는 땅이지만 권리 관계가 복잡해 위험한 사업장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토지 소유권이 분리돼 있어 지분을 두고 소송이 수차례 벌어졌다. 공사를 진행하려면 다른 지분 주인과 합의가 필요한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건물에 무슨 마(魔)가 끼었는지 외환위기와 저축은행 사태라는 대형 금융위기를 두 차례씩이나 맞으면서 주인이 모두 망해 나갔다. 매각 공고가 나오면서 여러차례 공사가 재개될 것으로 기대됐으나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예보는 한차례 팔았던 건물을 다시 또 팔아야하는 난감한 입장에 놓였다.
더이상 건물에 집착하면 매각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예보는 담보물인 건물을 처분하는 대신 대출채권과 그에 따른 권리를 매각하는 쪽으로 회수 방향을 바꿨다. 이렇게 되면 산 사람이 당장 공사를 시작하지 않더라도 추가 투자자를 모으거나, 채권을 매각하는 식의 다방면의 조치를 취할 수 있어 유리해진다.
또 이번에는 반드시 팔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경쟁형 수의계약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통상 수의 계약은 매수 희망자 여럿으로부터 인수 가격을 받은 후 제일 높은 가격에 매각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번에 예보는 매각 예정가격을 미리 공개했다. 현실적으로 매수 가능한 투자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인하기 위한 조치였다. 총 6개 회사로부터 인수금액을 받은 예보는 그 중 높은 가격을 제시한 2개 사를 대상으로 다시 협상에 들어갔다. 2개사의 인수가격을 경쟁시켜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가격에 매각하려고 한 것이다.
그 결과 예보는 차순위 협상자였던 하우스팬과 981억원에 최종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최초에 공개한 매각예정가 859억원보다 무려 122억원(14%)이나 더 높은 금액이었다. 하우스팬이 최초에 제시했던 가격 881억원보다도 100억원(11%) 높았다. 배창식 예금보험공사 청산회수2부장은 마지막 한푼이라도 더 회수하겠다는 생각으로 파격적인 매각 방식을 도입했고, 협상에 협상을 거듭하면서 매각 가치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예보는 지난 3월 20일 매수자로부터 잔금까지 받아 신한종금 사옥 관련 거래를 완전히 마무리했다. 17년째 방치돼있던 이 건물 공사도 조만간 재개될 예정이다. 박영철 하우스팬 대표는 오래토록 관심을 가져왔던 건물이었고 다른 데 매각할 생각이 없다”며 인허가 절차가 끝나는대로 공사를 재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마침 인근의 한전부지가 현대·기아차 그룹에 팔리면서 삼성동 주변 지역은 앞으로 몰라보게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강남 한복판의 대표적인 ‘흉물이었던 신한종금 사옥도 17년 만에 주인을 만나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할지 주목이 된다.
[배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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