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숙종을 다시 생각하다
입력 2015-04-02 16:45 

조선 19대 숙종(1661∼1720년·재위 46년)은 영정조 시대를 연 왕이지만 그 업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가 박하고 부정적이다. 그와 관해서는 경신, 기사, 갑술 등 전무후무한 세차례 환국 과정에서의 서인과 남인 간 당쟁 격화, 인현왕후와 장희빈 등 복잡한 여자관계가 우리에게 깊게 각인돼 있다. 하지만 19세기 유행한 한글소설을 보면 앞부분에 천편일률적으로 숙종대왕 호시절에”라는 상투적 표현을 쓰고 있다. 숙종에 대한 지금과 조선시대 인식은 어째서 이렇게 다른 것일까.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ㆍ원장 이배용)이 ‘2015년 장서각 아카데미 왕실문화강좌를 마련했다. 강좌는 이달부터 6월 18일까지 매주 목요일 진행된다. 영·정조대의 문예부흥기를 연 숙종을 재조명하는 자리다. 강좌에서는 숙종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논문 12편이 발표된다. 몇편을 보면 숙종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 숙종과 그의 가족(한희숙 숙명여대 교수), 숙종의 세자시절(김남기 안동대 교수), 환국시대(김학수 장서각 국학자료연구실장), 숙종과 오군영(노영구 국방대 교수), 숙종이 배양한 영·정조대의 르네상스(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숙종 어제를 통해 본 숙종의 성정과 인간적 면모(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백과사전편찬실장) 등이다.
숙종의 아버지 현종은 우유부단한 왕이었다.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상례(喪禮)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벌인 예송논쟁 과정에서 왕권은 실추되고 신권은 하늘을 찔렀다. 청나라의 사신들은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드센 ‘주약신강(主弱臣强)의 국가라고 비아냥댔다. 현종은 국가의 일은 가볍고 그대들의 주장은 소중하단 말인가”라고 탄식만 할뿐이었다.
1674년 8월에 14세의 나이로 즉위한 숙종은 비록 어렸지만 아버지와 달리 과단성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현종의 적장자이자 출생과 동시에 왕실의 지극한 관심 속에 제왕으로서 교육을 받았던 무결점 왕이었다. 왕과 신하는 같다는 ‘왕자사부동체(王者士夫同體), 왕과 신하가 나라를 함께 다스려야한다는 ‘군신공치(君臣共治)를 고집하던 노론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과는 애초부터 공존이 불가능했다.

숙종이 탄생했을 무렵 모든 사람들이 이를 축하하러 왔지만 송시열만은 병을 핑계로 오지않았다. 현종이 효종의 상중에 숙종을 잉태해 예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그랬다는 얘기가 세간에 파다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괘씸하게 생각했고 아들에게도 그러한 사실을 알려줬다. 이 때문에 종은 세자시절부터 송시열에게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숙종은 후일 희빈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정한 데 대해 송시열이 반대상소를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광해조 간신의 자식”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사약을 내렸다. 실록도 진실로 재주를 갖춘 것이 없었으며 기질이 거칠고 학문은 허술했다”고 폄훼했다. 거듭된 환국 과정에서 수많은 권심들이 목숨을 잃었고 남인의 편에 섰던 원자(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까지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숙종은 이처럼 땅에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는 동시에 민생 안정에 주력했다. 그의 치세에 정쟁은 격화됐지만 왕권이 강화해 사회 전반의 체제가 정비되고 안정됐다. 대동법과 양전사업, 균역법의 시행으로 조세체계가 확립됐으며 선원계보, 대명집계, 대전속록 등의 간행으로 법제가 정립됐다. 군사분야에서는 북한산성 등 성곽이 확충되고 유사시 서울과 그 외곽지역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5군영 체제가 구축됐다.
시대적 상황도 좋았다. 숙종 때는 전란의 피해가 모두 복구되면서 농업생산력이 증가하고 수공업이 발전해 상업경제가 활기를 띠던 시기다. 실제로 경제발전의 지표와 발달의 추세가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이 17세기 후반~18세기 초이다. 청나라의 영향도 컸다. 숙종 재위기간은 청나라의 번성을 이룬 강희제의 치세(1660~1722년)와 거의 겹쳐 청을 통해 서양학문을 담은 한역서역서가 대거 유입돼 우리나라 학자들과 기술관에 의해 실생활에 응용됐다. 조선후기 사상계를 지배하던 조선중화주의 사조는 조선의 고유색을 강조하는 진경(眞景) 문화의 꽃망울을 터트린다. 한글소설의 백미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가 창작됐고 시인 이병연이나 화가 정선도 그의 시대에 배출됐다. 숙종은 스스로도 문학적 소양이 뛰어났다. 그는 왕후와 왕자 등 가족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다루거나 궁궐에서 키우던 고양이, 닭 등 다양한 동물을 소재로 한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표현의 시를 다수 남겼다. 숙종은 자신의 작품을 시문집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국왕으로는 최초의 문집인 ‘자신만고(紫宸漫稿)이다.
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는 영·정조대인 18세기의 경제적 발전은 바로 숙종대의 이같은 축적이 있어 가능했으며 문화사상에서도 숙종시대는 특기돼야한다”면서 숙종의 아들인 영조마저 숙종을 경계로 그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고 있었음을 자각했다”고 설명했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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