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마트 점원 성칠 할아버지(박근형)에게 말을 걸때는 용기가 필요하다. 틈만 나면 버럭 성질을 내고,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귀가 떨어져나갈 것처럼 소리를 지른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원칙주의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해병대 출신인 성칠은 진열대 위 우유가 1㎝라도 삐져나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쇠꼬챙이처럼 꼿꼿한 할아버지를 흐트러뜨리는 ‘강적이 나타났다. 옆집에 이사온 금님 할머니(윤여정)다. 꽃집을 해서그런지 웃는 표정에서 향기가 나는 듯하다. 화난 표정의 성칠을 보고도 환환 미소로 화답하는 그녀. 성칠은 마음이 간지럽다. 내 나이가 70인데…” 감정을 외며하던 성칠에게 어느 날 금님이 말한다.
김성칠씨 밥 한번 사세요”
살 날보다 산 날이 더 많은 할아버지에게 봄바람이 부는 것일까. 강제규 감독의 영화 ‘장수상회는 노년에 찾아온 가슴 떨리는 로맨스를 들려준다. 마지막까지 사랑을 지킨 노부부의 삶을 통해 500만명 가까이 울린 다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처럼 이 작품 또한 그레이 로맨스의 열풍을 이어갈지 관심이 모아진다.
주인공이 노인들이라고 영화도 칙칙할 거란 예상은 성급하다. 사랑 앞에선 누구다 다 똑같다. 데이트를 앞둔 성칠은 마트 사장 장수(조진웅)에게 조언을 받는다. 여자한테는 무조건 예쁘다고 말하라고. 내가 밥도 사는데 왜 그래야하냐”고 버럭 화를 내던 성칠은 정작 금님 앞에서 신발이 예쁘다”며 수줍게 웃는다. 눈꺼풀은 처져있고 얼굴 가득 주름이 가득 패인 어르신들이지만 사랑에 빠진 모습은 귀엽고 발랄하다. 성칠은 금님으로부터 전화가 올까봐 집 전화를 침대 옆에 두고, 금님은 성칠한테 문자가 오면 얼굴이 확 밝아진다.
성칠의 사랑을 막는 것은 돈많은 수컷들도 아니고, 부모님의 반대도 아니다. 거부할 수 없는 육체의 노쇠함이다. 금님과 꽃놀이를 가기로 한 날, 금님이 나타나지 않는다. 난소에 질병을 앓고 있던 금님이 건강이 악화되면서 병원에 입원한 것. 중반부터 영화는 반전의 변곡점을 넘으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영화가 품은 반전을 밝힐 수 없는 게 아쉽다. 갑작스럽게 성칠에게 접근한 금님의 정체는 무엇일까. 관객은 금님이 성칠의 재산을 보고 접근한 ‘꽃뱀일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낼 수 있다. 강제규 감독은 영화 곳곳 금님의 정체를 암시하는 단서를 무심하게 던져놓는다. 영화 후반부 단서들이 하나로 모아지면서 금님의 정체가 밝혀질때 머리가 멍해지는 충격을 받을 수 있다.
황혼의 사랑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유한한 생의 끝자락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일 터다. 두 볼이 발그레 붉어지는 것이야 첫사랑때도 마찬가지겠지만, 또다른 사랑을 기약할 수 없다는 점에선 애가 끓고 곡진하다. 성칠과 금님의 알콜 달콩 데이트를 볼때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면서도 마음 한켠이 짠한 이유다. 사랑은 뜨겁게 불타오르는 순간 ‘완성되는 게 아니고 죽을때까지 지켜야 ‘완성된다고 영화는 말한다.
운명이 다하는 날까지 서로 아끼며 사랑하는 삶이 ‘판타지가 된 요즘, 영화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갈증을 풀어준다.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퇴색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다” 숱한 로맨스 영화에서 반복된 주제가 이 영화에서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두 노장 배우의 연기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박근형은 연기하는 내내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고 했다.
노년의 ‘화사한 끝사랑은 벚꽃이 흐드러질 4월9일 스크린에 피어난다.
[이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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