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조우영 기자] 여행길은 늘 설렌다. 빙그레 웃을 완(莞)자를 쓰는, '섬 아닌 섬' 완도로 향하는 마음은 왠지 푸근하다. 남도 특유의 풍성한 먹거리와 넉넉한 인심이 주는 막연한 향수가 여행자의 설렘을 더욱 부풀게 했다.
배우 유장영(32)은 완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단순히 여행자가 아닌, 그곳이 삶의 터전이었던 그에게 완도는 어머니나 다름없다. 그는 "고향을 생각하면 빙그레 웃음이 나오면서 애달프다. 어머니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 '청년' 유장영의 노래 : '나는 나비'(YB)
그렇게 상경 6년 만에 그는 악극 '모정의 세월'에서 주인공 자리를 당당히 정식으로 꿰찼다. 이 공연으로 그는 고향인 완도 문화예술의전당에서 무대를 마치고 어머니께 큰절을 올렸다. "극 중 시대적 배경이 달랐지만 내가 살아온 모습과 상황이 매우 비슷했다. 지금 불효 중인 것도 똑같다. 배우로서 어머니를 모시고 나니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내 앞에서 만큼은 항상 강한 분이시다."
그러던 어느날,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고 싶은/ 노래하며 춤추고 싶은/ 나비(YB '나는 나비' 가사 인용)가 됐다." 아마추어 밴드 '등대지기'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잘 하진 못했지만 늘 무대에 서는 걸 좋아했던 그다. 지난 2005년 KBS 대하사극 '해신' 청해포구세트장이 완도에 생기면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워낙 시골이라 감히 꿈꾸지 못했을 뿐, 자신이 무대 체질이라는 것을….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극 무대를 누비며 힘들 때도 있었지만, '나는 나비'를 들으면 힘이 나곤 했다. 이 노래를 부르면 왠지 가슴 속 뜨거운 무언가가 막 끓어오른다."
■ '배우' 유장영의 노래 :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버즈)
어둠이 깔릴 무렵 높은 곳에 올라와 고향을 내려다보는 유장영의 눈빛은 빛났다. 그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말했다. (여행 훗날, 영화 '어우동'의 개봉관 수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이 영화 대본을 끌어안고 잘만큼 애착이 컸다) 모험과 도전의 연속이다. 그는 "이제 배우 생활 2~3년밖에 안 된 것 같다"고 했다. 멀리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연예인'이 아닌,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는 밴드 버즈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배우 유장영의 노래'로 꼽았다. "되짚어 보면 학창시절 공부를 못해서 이제 끊임없이 배우는 것 같다. 지금도 난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내 꿈을 찾아가는 여행 중이다. 여러 시간과 상황 속 많은 산과 바다처럼 인생 굴곡이 있겠지만 그 여행을 즐기겠다."
자동차 안, 버즈의 노래가 울렸다. '저 푸른 바다 끝까지 말을 달리면/ 소금 같은 별이 떠 있고/ 사막엔 낙타만이 가는 길/ 무수한 사랑 길이 되어 열어줄거야/ 낡은 하모니카 손에 익은 기타/ 유어 멜로디.' 경쾌한 기타 사운드와 드럼 비트 속 포효하듯 노래하는 유장영의 목소리가 가슴을 때렸다.
■ '사람' 유장영의 노래 :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김광석)
"시쳇말로, 사람이 됐다." 아버지를 여윈 술 취한 친구의 부탁을 듣고 오밤중 공동묘지를 갔으나 산소를 찾지 못해 묘비마다 절을 하고 다녔던 사연 등에서 그의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단점이 없다는 것. 그것이 싫다"고 흉을 보던 한 친구는 "장영이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다르다. 늘 진심으로 대한다"며 꼬인 혀를 풀었다. 인기 개그 코너 '극한 직업' 상황극을 벌이던 유장영의 매니저는 "너무 힘들다"고 투덜대더니, "연습하느라 쉬는 시간에도 잠을 안 자는 배우"라는 게 그 이유였다.
취기가 흥을 삼킬 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가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으면서 노래 한 자락을 뽑았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메어 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중략 /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고(故)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다.
"생뚱맞게 젊은 친구가 왜 이런 노래를 부르느냐 할 수 있는데 난 김광석 노래 향기가 좋다. 이 노래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으려면 아직 멀었지만 우리 부모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내 삶, 친구의 삶, 우리 부모의 삶이 다르지 않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아픔과 행복, 웃음과 눈물이 있다. 그들의 삶 속에 함께 하는 따뜻한 배우가 되고 싶다. 화려하지 않아도 오래 남는, 사람들이 일상에 지쳐 있을 때 날 보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배우라면 좋겠다."
■ 진주를 닮은 배우 유장영..그리고 어머니의 마음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에 눈을 뜨니 햇살이 눈부시다. "으디쯤이냐잉" 수화기 넘어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유장영의 어머니다. 그의 어머니는 완도항 근처에서 수산물 도소매업을 한다. 귀경길을 앞두고 마지막 인사를 재촉했다. 고무장갑과 장화 차림의 어머니에게서 김이 뿜어져나오는 추운 날씨였다. 어머니는 전복과 김을 우리에게 한아름씩 안겼다.
"사실 장영이 미워서 안주까 했는디, 지가 하고 싶은 거 잘 밀어주지 못혀서 미안스럽기도 하고 안쓰러워서 줘요잉. 서울 올라가서 실컷 드쇼" 어머니 눈시울이 붉다. 손사래를 치는 일행에게 "나 듣도 보도 몬한 욕 잘해. 벌써 저놈(유장영)한테는 몇 번 했다"며 웃음기 머금은 화를 냈다.
"못난 아들이어서 죄송하다"는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못나진 않았다. 서울 올라가기 전 가게 앞에 여고생들이 엄청 찾아와서 편지와 선물을 놓고 가곤 했다"며 그를 또 슬쩍 치켜 세웠다. "우리 때는 그랬다. 먹고 살기만 바빠서 그것이 재능인지 뭔지 잘 몰랐다"는 게 어머니의 말이다. "난 그냥 30년이 넘도록 이 장화를 못 벗고 있소." 아이들 어렸을 때 제대로 돌볼 형편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지금껏 별 사고 없이 커준 자식들이 고마울 뿐이다. 본인의 희생은 생각하지 않는다.
"싸게싸게(빨리빨리) 가라"면서도 어머니는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다 살피면서 조심히 가란다. "길가에 꽃이 피었으면 감사하게 여기고, 잡초에 걸려 넘어지면 오히려 보듬어주라"고도 했다. 유장영은 "서울에서 혼자 많이 울고, 혼자 많이 걸은 적도 있다. 하지만 감히 내가 힘들었다고 말하기는 부끄럽다"며 입을 앙다물었다.
조개와 달리 전복 속 진주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똑같은 색깔도 없다. 완도의 배우 유장영은 전복 진주를 닮았다. 내면은 잘 다듬어졌다. 영롱한 진주는 하나의 상처에서 만들어진다. 정호승 시인은 이를 두고 "오랜 시간 동안 정성을 다해 상처를 보듬고 감싸는 일. 그것이 아름다운 보석을 만드는 일이었다"고 했다. 작품에 따라 각기각색의 빛을 발하는 팔색 매력의 배우 유장영을 주목해야할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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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유장영(32)은 완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단순히 여행자가 아닌, 그곳이 삶의 터전이었던 그에게 완도는 어머니나 다름없다. 그는 "고향을 생각하면 빙그레 웃음이 나오면서 애달프다. 어머니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사진2) 완도항 방파제길. 제방둑 왼쪽과 오른쪽의 물살이 확연히 다르다.
어머니는 우악스러운 파도를 다 받아내 준 방파제 같은 존재다. 완도항 앞바다에 젖가슴처럼 봉긋 솟은 주도(珠島)의 붉가시나무들이 어머니 주름처럼 선명하다. 어판장 어머니의 빨간색 고무장화는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다. 가난이 할퀸 생채기의 쓰라림을 대물림 하지 않으려는 생존의 가르침이다.사진3)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28호인 주도는 천연 상록수림의 보고다. 소나무, 붉가시, 광나무, 황칠, 후박, 동백 등 137종이 서식하고 있다.
그가 배우의 꿈을 품고 상경한 지 10년째. "딱 1년만 해보고 돌아오겠다"며 어머니 뜻을 거스르고 완도를 떠났는데, 벌써 10년이 됐다. 그는 "이제 시작인 것 같다"고 했다. 첫 영화에서 꽤 큰 배역을 맡았다. 영화 '어우동 : 주인 없는 꽃'의 성종 역이 그였다. 여주인공 송은채(어우동 역)와 정사신을 비롯한 그의 섬세한 내면 연기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사진4) 완도여객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장영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가 그대로 있다.
하지만 완도에서 그는 여전히 '배우 유장영'이 아닌, '청해진수산네 아들'일 뿐이다. 산기슭 비탈길 그가 태어난 집이 아직 남아있다. 유년시절 한 없이 커보이던 팽나무가 남아있다. '국민학교' 시절 좋아했던 정현이 누나의 집이 남아있다. 제일 예뻤던 또래 친구 송이네 집도 남아있다.■ '청년' 유장영의 노래 : '나는 나비'(YB)
사진5) 완도 문화예술의전당 앞에서 옛 기억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은 유장영.
10년 전, 스물두 살 '청년' 유장영은 서울에 올라와 약수동 지하에 있는 한 작은 극단에 들어갔다. "걸레부터 빨겠다"고 했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랐다. 청소년연극 '종이비행기'로 데뷔해 '패밀리! 빼밀리?'라는 세미 뮤지컬에서 갑자기 빠지게 된 선배의 대타로 처음 주연을 해봤다. "기회가 왔으니 잡았고, 그 이후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그렇게 상경 6년 만에 그는 악극 '모정의 세월'에서 주인공 자리를 당당히 정식으로 꿰찼다. 이 공연으로 그는 고향인 완도 문화예술의전당에서 무대를 마치고 어머니께 큰절을 올렸다. "극 중 시대적 배경이 달랐지만 내가 살아온 모습과 상황이 매우 비슷했다. 지금 불효 중인 것도 똑같다. 배우로서 어머니를 모시고 나니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내 앞에서 만큼은 항상 강한 분이시다."
사진6) 유장영은 지금도 집에 가면 가게 일손을 돕는다. 가게에는 10여 명의 직원이 있는데 대부분 그에게 일을 배운 이들이다.
그가 처음부터 배우를 꿈꾼 건 아니었다.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어머니 가게 일을 도왔다. 전복·문어·낙지·소라 등 각종 수산물을 취급하는 어머니에게 그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솜씨 좋은 일꾼이었다.그러던 어느날,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고 싶은/ 노래하며 춤추고 싶은/ 나비(YB '나는 나비' 가사 인용)가 됐다." 아마추어 밴드 '등대지기'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잘 하진 못했지만 늘 무대에 서는 걸 좋아했던 그다. 지난 2005년 KBS 대하사극 '해신' 청해포구세트장이 완도에 생기면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진7) 밴드 등대지기 연습실과 완도청해포구세트장에서의 유장영.
동경의 대상이던 연예인들의 드라마 촬영 현장을 직접 본 것이다. 몰래 숨어서 보다가 쫓겨나기 일쑤였다. 현장 스태프들과 친해지면서 나중에는 일을 도왔다. 당시 한 매니저와 친분을 쌓고, 그 덕에 '해신' 출연진과 식사를 한 번 한 적도 있다. 그때 최수종 팬이었던 동네 이모들이 다 몰려오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다. "아마 그때 그 녀석이 저라고 하면 깜짝 놀라실텐데 아직 현장에서 최수종 선배를 뵙지는 못했다. 하하."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워낙 시골이라 감히 꿈꾸지 못했을 뿐, 자신이 무대 체질이라는 것을….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연극 무대를 누비며 힘들 때도 있었지만, '나는 나비'를 들으면 힘이 나곤 했다. 이 노래를 부르면 왠지 가슴 속 뜨거운 무언가가 막 끓어오른다."
■ '배우' 유장영의 노래 :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버즈)
사진8) 완도타워에서의 풍경들.
완도타워를 찾았다. 다도해와 완도항 주변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다도해일출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아침에 오르면 해돋이가 장관이다. 날씨가 좋으면 제주도까지 보인다. 석양도 좋다. 타워에서 바라본 북쪽은 완도읍에서 이어진 신지대교와 바다풍광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남쪽으로는 청산도가 있고 바다에는 전복농장이 촘촘하다.어둠이 깔릴 무렵 높은 곳에 올라와 고향을 내려다보는 유장영의 눈빛은 빛났다. 그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말했다. (여행 훗날, 영화 '어우동'의 개봉관 수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이 영화 대본을 끌어안고 잘만큼 애착이 컸다) 모험과 도전의 연속이다. 그는 "이제 배우 생활 2~3년밖에 안 된 것 같다"고 했다. 멀리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연예인'이 아닌,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는 밴드 버즈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배우 유장영의 노래'로 꼽았다. "되짚어 보면 학창시절 공부를 못해서 이제 끊임없이 배우는 것 같다. 지금도 난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내 꿈을 찾아가는 여행 중이다. 여러 시간과 상황 속 많은 산과 바다처럼 인생 굴곡이 있겠지만 그 여행을 즐기겠다."
사진9) 정도리 구계등은 통일신라시대 황실의 녹원지로 지정될 만큼 아름답다.
날씨가 화창했던 다음날 정도리 구계등 갯돌해변에 드러누운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천 수만년 시간에 침식된, 크고 작은 갯돌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도 눈을 감은 채 들어본다. "천천히 깎이고 다듬어져 둥근 돌이다. 대신 아주 단단해 보이지 않는가. 우리네 삶이 그런 것 같다." 언젠가는 모래알만큼 작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또 바람따라 물따라 흘러가면 된다.자동차 안, 버즈의 노래가 울렸다. '저 푸른 바다 끝까지 말을 달리면/ 소금 같은 별이 떠 있고/ 사막엔 낙타만이 가는 길/ 무수한 사랑 길이 되어 열어줄거야/ 낡은 하모니카 손에 익은 기타/ 유어 멜로디.' 경쾌한 기타 사운드와 드럼 비트 속 포효하듯 노래하는 유장영의 목소리가 가슴을 때렸다.
■ '사람' 유장영의 노래 :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김광석)
사진10) 이십 여년 전 친구들과의 추억(사진 오른쪽)을 떠올리며 완도항 등대 앞에서 포즈를 취해본 유장영.
그가 왔다는 소식에 완도·해남·광주 등지에 각각 흩어져 살고 있는 친구들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다. 시끌벅적 유쾌한 술판이 벌어졌다. "신체 비밀을 포함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농담섞인 협박과 폭로가 걸쭉하게 흥을 돋웠다. 김이 샌 건, 듣다보니 결국 다 그의 칭찬으로 귀결됐다는 점이다."시쳇말로, 사람이 됐다." 아버지를 여윈 술 취한 친구의 부탁을 듣고 오밤중 공동묘지를 갔으나 산소를 찾지 못해 묘비마다 절을 하고 다녔던 사연 등에서 그의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단점이 없다는 것. 그것이 싫다"고 흉을 보던 한 친구는 "장영이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다르다. 늘 진심으로 대한다"며 꼬인 혀를 풀었다. 인기 개그 코너 '극한 직업' 상황극을 벌이던 유장영의 매니저는 "너무 힘들다"고 투덜대더니, "연습하느라 쉬는 시간에도 잠을 안 자는 배우"라는 게 그 이유였다.
취기가 흥을 삼킬 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가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으면서 노래 한 자락을 뽑았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메어 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중략 /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고(故)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다.
"생뚱맞게 젊은 친구가 왜 이런 노래를 부르느냐 할 수 있는데 난 김광석 노래 향기가 좋다. 이 노래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으려면 아직 멀었지만 우리 부모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내 삶, 친구의 삶, 우리 부모의 삶이 다르지 않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아픔과 행복, 웃음과 눈물이 있다. 그들의 삶 속에 함께 하는 따뜻한 배우가 되고 싶다. 화려하지 않아도 오래 남는, 사람들이 일상에 지쳐 있을 때 날 보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배우라면 좋겠다."
■ 진주를 닮은 배우 유장영..그리고 어머니의 마음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에 눈을 뜨니 햇살이 눈부시다. "으디쯤이냐잉" 수화기 넘어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유장영의 어머니다. 그의 어머니는 완도항 근처에서 수산물 도소매업을 한다. 귀경길을 앞두고 마지막 인사를 재촉했다. 고무장갑과 장화 차림의 어머니에게서 김이 뿜어져나오는 추운 날씨였다. 어머니는 전복과 김을 우리에게 한아름씩 안겼다.
"사실 장영이 미워서 안주까 했는디, 지가 하고 싶은 거 잘 밀어주지 못혀서 미안스럽기도 하고 안쓰러워서 줘요잉. 서울 올라가서 실컷 드쇼" 어머니 눈시울이 붉다. 손사래를 치는 일행에게 "나 듣도 보도 몬한 욕 잘해. 벌써 저놈(유장영)한테는 몇 번 했다"며 웃음기 머금은 화를 냈다.
"못난 아들이어서 죄송하다"는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못나진 않았다. 서울 올라가기 전 가게 앞에 여고생들이 엄청 찾아와서 편지와 선물을 놓고 가곤 했다"며 그를 또 슬쩍 치켜 세웠다. "우리 때는 그랬다. 먹고 살기만 바빠서 그것이 재능인지 뭔지 잘 몰랐다"는 게 어머니의 말이다. "난 그냥 30년이 넘도록 이 장화를 못 벗고 있소." 아이들 어렸을 때 제대로 돌볼 형편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지금껏 별 사고 없이 커준 자식들이 고마울 뿐이다. 본인의 희생은 생각하지 않는다.
"싸게싸게(빨리빨리) 가라"면서도 어머니는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다 살피면서 조심히 가란다. "길가에 꽃이 피었으면 감사하게 여기고, 잡초에 걸려 넘어지면 오히려 보듬어주라"고도 했다. 유장영은 "서울에서 혼자 많이 울고, 혼자 많이 걸은 적도 있다. 하지만 감히 내가 힘들었다고 말하기는 부끄럽다"며 입을 앙다물었다.
조개와 달리 전복 속 진주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똑같은 색깔도 없다. 완도의 배우 유장영은 전복 진주를 닮았다. 내면은 잘 다듬어졌다. 영롱한 진주는 하나의 상처에서 만들어진다. 정호승 시인은 이를 두고 "오랜 시간 동안 정성을 다해 상처를 보듬고 감싸는 일. 그것이 아름다운 보석을 만드는 일이었다"고 했다. 작품에 따라 각기각색의 빛을 발하는 팔색 매력의 배우 유장영을 주목해야할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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