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 7억 가졌는데도? 중산층 몰락과 박탈감
입력 2015-01-08 11:39 
가족을 거느린 가장은 예나 지금이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 서초동에 사는 40대 가장이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사건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이 40대 가장인 강 씨가 살던 곳은 11억 원대 44평형 서울 강남의 고급아파트입니다.

2004년 5월 대출 없이 이 아파트를 샀습니다.


명문 사립대 경영학과를 나와 외국계 IT 기업 한국지사에서 회계 담당 상무까지 지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가장이었습니다.

2009년 회사를 퇴사했고, 한방 병원에 취업해 그런대로 잘나가는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2012년 12월 대표가 바뀌면서 스스로 일을 그만두면서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금방 새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직장은 쉽게 구해지지 않았습니다.

퇴사 한 달 전 그는 집을 담보로 5억 원 가량을 대출했습니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려던 걸까요?

사업 혹은 주식투자?

경찰에 붙잡힌 강 씨는 대출 받은 돈으로 매월 생활비 400만 원을 주고 나머지로 주식투자를 하다가 2억 7천만 원을 잃었다고 말했습니다.

구상했던 일이나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주식투자를 한 걸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주식투자를 하고자 직장을 관둔 걸까요?

▶ 인터뷰 : 김성태 /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팀장
- "컴퓨터 관련 회사에 근무하다가 3년 전에 퇴직하고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비관해서…."

강 씨는 자녀들에게 실직 사실을 숨기기 위해 선후배 사무실을 오가기도 했고, 최근 1년 동안은 서초구의 한 고시원에 다녔다고 합니다.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고 퇴근하는 모습을 3년 가까이 연출한 겁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생활은 예전과 똑같았습니다.

딸들도 비싼 학원을 그대로 다녔습니다.

▶ 인터뷰 : 이웃 주민
- "생활고가 있으면 여기(요가학원) 연 회원권을 끊을 수 없을 텐데. (딸이) 두 번이나 끊어서…."

직장도 없고, 주식 투자로 2억 7천만 원을 잃었지만 그래도 강 씨에게는 7억 원의 순자산이 있었습니다.

아내 통장에는 3억 원의 예금까지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강 씨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런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결국, 강 씨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상류층, 중산층으로 살아온 삶이 갑자기 하층으로 추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강 씨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유복하게 키워 고생을 모른 것이 화근이었다며 스스로를 자책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강 씨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강 씨를 탓합니다.

그러나 강 씨 개인적인 문제로 모든 것을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 중산층 붕괴와 그 몰락을 지켜보면서 이 시대 많은 가장은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혹시 내가 저렇게 되는 건 아닐까?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거지?

갤럽 조사를 보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응답한 가구가 1989년에는 75%에 달했는데 2013년 한 조사에서는 20.2%로 줄었습니다.

1인당 국민총소득 5,000달러 시대에는 3명 가운데 2명이 중산층임을 자부했지만, 2만 6000달러 시대에는 거꾸로 다섯 중 하나만이 중산층이라 답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1990년의 경우 중산층 가구의 월평균 총소득은 82만 원으로, 이자 부담 등 비소비성 지출을 뺀 처분 가능소득은 70만 원이었습니다.

100만 원을 번다면 85만 원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에는 월평균 총소득 384만 원, 처분 가능소득 316만 원으로 소득금액 자체는 증가했지만, 소비여력은 되려 3%포인트 줄었습니다.

연금, 보험료 등 비소비성 지출 비중이 늘어난 데다 자녀 교육비, 집값 부담에 치여 나타난 현상입니다.

전셋집 마련하는 데 단순비교만 해봐도 24년 전보다 3배의 기간이 소요될 정도입니다.

현대경제연구원 조사 결과 중산층은 4인 가족 기준 부동산과 금융자산을 합해 6억 6000만 원은 돼야 합니다.

세금과 4대 보험을 제외하고 월평균 515만 원을 벌어 341만 원을 쓰고 매주 12만 원 상당의 외식을 즐기는 한편 소득의 2.5%를 기부하는 수준입니다.

2013년 한국사회학회 조사에서는 중산층이라면 자산 10억 원, 연봉 7000만 원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충족시키는 사람은 실제로 우리 사회의 4~6%에 불과합니다.

이 기준에 들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기준에서 탈락하면 강 씨처럼 극단적인 절망감을 느낍니다.

상대적 박탈감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 4~5% 상류층이 갖고 있는 부가 너무나 크기에, 그들이 누리는 삶이 우리의 지표가 되어버려 자꾸만 멀어지다 보니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총소득은 늘어났지만, 집값과 전셋값, 보험료, 노후 대비 연금 등으로 실제 쓸 수 있는 돈이 별로 없다는 것, 심지어 빚을 내 이를 충당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자위할 수 있을까요?

박근혜 정부는 '중산층 70% 달성'을 목표로 내걸었습니다.

최경환 부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기업의 유보이익이 근로자 임금 인상을 통해 가계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부동산과 세제를 비롯해 다양한 중산층 복원책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소득공제 축소에 담배와 술 소비세 인상으로 중산층 쥐어짜기는 더 심해졌습니다.

7억 원을 쥐고도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강 씨 같은 가장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중산층은 사실 엄격한 사회 계급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중산층 몰락이 더 무섭습니다.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여겼던 사람들이 계층 하락감을 느끼거나, 절망감을 느끼면 경제 동력과 사회적 안정성은 급격히 불안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4년 우리 사회 중산층의 일면입니다.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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