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당국 압박에…기술금융 편법 실적쌓기
입력 2014-10-07 17:43  | 수정 2014-10-07 22:23
■ 금융 보신주의를 깨자
수도권에서 플라스틱 제품 제조업을 하는 A사장은 최근 운전자금 5000만원을 대출받는 과정에서 희한한 경험을 했다. 당초 대출을 위해 은행을 찾아가 첫 상담을 했을 때는 담당자에게서 '담보와 경영상태 등을 볼 때 대출에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 은행 담당자로부터 '기술신용평가기관(TCB)의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으니 신청서를 내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A사장은 "단순 사출업이어서 기술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으니 그냥 담보대출을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은행은 거듭 TCB 평가를 요구했고 결국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금융위원회가 중소기업 등 기술력을 바탕으로 여신을 하는 기술금융에 대해 '실적을 평가하겠다'고 나서면서 은행 영업현장에서 '실적용 대출'이 등장하는 등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TCB 평가만 받으면 기술금융 실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기술력과 관련 없는 중소기업들이 담보ㆍ신용대출 등을 요청해도 이들에게 TCB 평가를 요구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한마디로 기술력이 낮은 기업에 나간 대출이 기술금융으로 둔갑하고 있는 셈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들은 영업점에 기술금융ㆍ중소기업 대출 영업을 적극 확대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은 금융당국이 이달부터 기술금융 상황판을 설치하고 은행별 실적을 비교하겠다고 나선 것과 관련이 깊다. B은행 임원은 "은행의 특성상 기술금융을 적극적으로 밀고 있는 금융당국의 방향을 거스를 수 없다"며 "각 지점에 기술금융 대상 기업을 적극 발굴해 실적을 높이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금융위는 담보력 등은 부족하지만 기술력이 뛰어나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중소기업을 지원한다는 취지에서 기술금융을 장려하고 있다. 특히 은행들이 중소기업의 기술력에 대한 평가 자료를 얻을 수 있도록 TCB도 활성화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당국이 실적 평가에 나서자 영업현장에서는 이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기술력과 관련 없는 대출을 기술금융으로 둔갑시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더구나 금융당국의 실적 평가 기준에도 구멍이 있어 이런 영업을 부추기고 있다.
TCB 평가는 해당 기업의 기술력 수준에 따라 1~10등급까지 결과가 나온다. 1등급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은행들은 이 평가 등급을 중소기업 등 대출 때 활용하게 되는데 사실상 6등급 아래는 기술금융의 의미가 크지 않다는 게 금융권 판단이다.
하지만 금융위는 일단 TCB 평가를 받으면 6등급 아래의 경우라도 기술금융 실적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이러다 보니 은행 영업현장에서는 대출을 신청하는 기업에 대해 기술력이 낮더라도 일단 TCB 평가를 받으라고 요청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일반 담보ㆍ신용대출로 처리될 것이 기술금융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대출이 지연되는 등 고객 불편도 야기되고 있다.
TCB 평가를 받는 데 2주가량이 소요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대출을 처리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이다. 금융위도 이런 부작용을 인정하지만 기술금융 정착을 위해 낮은 평가등급도 실적으로 인정해주고 있다는 입장이다. 다만 은행들이 기술금융 실적을 부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제도를 개선할 계획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기술평가 시스템 정착을 위해 지금은 다양한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기술 수준이 뒤떨어지는 기업에 대한 평가도 이런 차원에서 활용할 만한 가치는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앞으로는 기술금융 실적에 대해서 일괄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각 대출에 대해서 차등화해 평가할 것"이라며 "기존 거래 기업이 아닌 신규 기업에 대해 대출하거나 기술등급이 높은 기업에 대한 대출 등에서는 가산점을 부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기술 수준이 떨어지는 기업에 대한 대출이나 기존 거래 기업에 대한 대출 등에 대해서는 실적 인정 비율을 최소화하겠다는 방침이다.
[김규식 기자 / 안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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