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경쟁을 통해 혁신이 등장하고 그 결과 싸고 질좋은 상품과 서비스가 소비자들에게 제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이 과하다보면 이른바 상도를 깨는 행위도 심심찮게 일어나며 심지어 법을 어기면서까지 자사의 이익을 추구하기도 한다. 지나친 경쟁의식으로 야기되는 행위는 시장 참가자 뿐 아니라 소비자들의 눈살까지 찌푸리게 해 결국 신뢰도의 저하로 이어진다. 최근 업종을 막론하고 상도를 깨는 행위가 빈발해 해당 업계의 주의가 요망된다.
◆해외 나가서 망신살 뻗친 전자업계
지난 5일부터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 가전박람회 IFA 2014에서는 작은 소동이 화제가 됐다. 바로 LG전자 연구소 소속 한 임원이 직원들과 함께 베를린 시내 가전 매장인 새턴 유로파 센터를 찾아 타사 제품들을 살펴보다 삼성전자의 크리스탈 블루 도어 세탁기를 파손한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임원은 타사 세탁기들의 문을 점검하면서 크리스탈 블루 도어 세탁기의 문도 동일하게 점검하는 와중에 매장 직원에게 제품을 파손하고 있다는 의혹을 사 경찰에 신고까지 당했다. 출두한 경찰은 임원이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삼성전자 관계자의 입회 하에 신원 조사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해당 임원이 세탁기의 문에 고의로 압력을 가해 연결 부위를 파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LG전자 측은 연구소 소속 임원이 타사 제품을 살펴보다 일어난 해프닝으로 고의성은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삼성 측은 CCTV 확인 결과 베를린 시내 다른 매장에서도 LG전자 임원 일행이 출입했으며 파손된 제품이 발견됐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 측 관계자는 "최고위 임원이 외국에서 직접 타사 제품을 파손시킨 것도 심각한 사안이지만 거짓해명을 통해 당사 전략제품을 의도적으로 폄하한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이라며 LG전자 HA사업본부 조성진 사장과 세탁기 담당 조모 임원, 신원불상 임직원 등을 업무방해, 재물손괴, 명예훼손 등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수사 의뢰했다고 밝혔다.
논란의 대상이 된 크리스탈 블루 도어 세탁기는 삼성전자가 올 초 출시한 제품으로 간편한 조작과 큰 문으로 유럽 각지에서 호평받은 바 있다. 따라서 경쟁사인 LG전자도 큰 관심을 가질수밖에 없는 제품이다. 게다가 전세계 가전업체들이 신제품을 들고 나오는 전시회인만큼 다른 제품들과 비교할 수 있다는 이득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감안해도 LG전자의 이번 행동은 쉬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경쟁사 제품에 대한 시험은 직접 구매한 다음 연구소 내에서 이뤄진다. 자동차 업체의 경우 경쟁사가 신차를 출시하면 부품 하나까지 샅샅히 분해해 살펴보는 것이 관례다. 가전업체도 상황은 비슷하다.
LG전자도 삼성전자의 크리스탈 블루 도어 세탁기의 성능이나 상태가 궁금했다면 직접 구매한 뒤 연구소에서 분석했으면 될 일이다. 직접 구매한 이상 망치로 부수거나 바닷물에 담궈도 뭐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크리스탈 블루 도어 세탁기는 IFA 2014에 첫 등장한 제품도 아니고 올해 초 이미 출시된 제품이다.
사태 이후 LG전자의 태도도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LG전자는 입장 자료를 통해 다른 회사 세탁기는 멀쩡했지만 유독 특정업체 제품만 손상되는 현상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사고를 내놓고 피해자에게 왜 너만 다쳤냐고 하는 것에 다를 바 없다. 전세계 가전 1위를 노리는 회사답지 않은 행동이다.
◆'네 탓 또 네 탓만'하는 주류업계
주류업계에서는 카스의 소독약 냄새 논란이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 간 진실게임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카스의 소독약 냄새에 대해 산화취로 결론내리며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경찰이 하이트진로 본사를 압수수색하면서 제2라운드를 맞이한 것.
이번 논란의 시작은 지난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카카오톡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는 카스 냄새에 대해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주장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2014년 6월부터 8월 생산된 카스는 마시면 안 된다", "특히 가임기 여성들은 무조건 피하라" 등이 대표적이다.
악성 루머에 매출 감소의 위협까지 느낀 오비맥주는 루머 유포자에 대한 경찰 수사를 의뢰했다. 물론 수사 의뢰 과정 중 특정 회사를 지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비맥주는 이미 언론보도 등을 통해 '특정 세력이 주도한 루머'라며 경쟁사를 염두에 둔 듯한 발언을 쏟아냈고 경찰은 공교롭게 하이트진로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양사 간 비방전이 이전투구 양상을 띠게 된 이유다.
오비맥주 측은 "하이트진로는 과거 처음처럼 알칼리 환원수 논란 때도 예산까지 편성해 경쟁사를 비방한 전력이 있다"며 이번 카스 소독약 냄새 논란의 배후에도 하이트진로가 있다는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하이트진로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논란의 시발점은 오비맥주의 카스에서 났던 소독약 냄새인데 본질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실 경쟁이 치열한 주류업계에서 경쟁업체에 대한 크고 작은 루머를 퍼트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최근 하이트진로는 롯데주류의 '처음처럼'에 들어간 알칼리 환원수가 인체에 해롭다는 주장을 조직적으로 퍼뜨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유죄판결을 받은 게 한 예다. 롯데주류 임직원 역시 '하이트진로 참이슬에 경유가 들어있다'는 악성 루머를 퍼뜨린 혐의로 수사를 받는 중이다.
잊을만 할 때 쯤이면 불거지는 주류업계 비방전에 소비자들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이번 논란만 해도 전국 각지에서 카스의 소독약 냄새에 대한 민원이 잇따라 제기됐지만 오비맥주는 소비자들에게 진정성있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하이트진로 압수수색에도 오비맥주를 바라보는 소비자들의 시선이 불편한 이유다.
하이트진로에 대해서도 마뜩잖기는 마찬가지다. 압수수색은 어디까지나 일부 직원에 해당한 일일 뿐 회사 전체와는 무관하다고 선을 긋고 있어서다. 재발 방지에 노력하겠다는 등의 책임감 있는 기업의 모습을 엿보기가 힘들다.
주류업계 한 관계자는 "하루가 멀다하고 네 탓만 하는 모습에 소비자들은 불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당장의 이익을 위해 경쟁사 흠집내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소비자 불신으로 이어지고 결국 업계의 공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요금제 출시 당일날 '베끼기' 논란
통신업계에서도 경쟁사간 상도를 넘어선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특히 시장 참여자가 3사로 고정된 이동통신에서는 철판을 까는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유필계 LG유플러스 부사장은 지난 4월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LTE8무한대 요금제 출시 행사에서 수많은 기자들을 앞에 두고 얼굴을 붉혔다.
그는 "CEO가 직접 나와 기자간담회를 하는 중간에 경쟁사가 보도자료를 뿌리는 것은 상도의에 어긋난다"며 "LG유플러스는 3개월 전부터 정부와 함께 검토해 (LTE 무제한)요금제를 만들었는데 통신업계의 큰 형이자 1위 사업자가 3위 사업자의 요금제를 베끼는 것은 점잖지 못한 행동"이라고 못박았다.
이날은 이상철 부회장 등 LG유플러스 임원들이 총 출동해 국내 최초로 LTE무제한 요금제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LG유플러스에 따르면 음성·문자·데이터까지 제한없이 사용하는 LTE8 무한대 요금제를 만들기 위해 LG유플러스는 극비리에 팀을 꾸리고 일을 진행해 왔다.
하지만 이날 기자회견 도중 기자들의 휴대전화에 문자 수신음이 동시에 울렸다. SK텔레콤도 무제한 요금제를 출시한다는 내용이었다. KT도 이날 오후 무제한 요금제를 출시했다.
현행 통신요금 인가제에 따라 통신사는 요금제를 새로 출시하는 경우 정부에 인가를 받거나 신고를 해야 한다. 1위 사업자의 경우 허가를, 2위와 3위 사업자는 신고를 하도록 돼 있다. 즉 무선통신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은 요금제 출시를 위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KT와 LG유플러스는 신고만 하면 된다. 다만 요금제 인하의 경우 1위 사업자도 신고만으로 요금제 출시가 가능하다. 업계에 따르면 LG유플러스는 요금제 발표 15일전 방송통신위원회에 해당 요금제 출시를 신고했으며 SK텔레콤은 기자회견 하루 전에 요금제 허가를 요청해왔다.
LG유플러스 측은 "지난해에도 LG유플러스가 이동통신 3사 최초로 LTE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를 발표하자 이날 저녁 KT가 거의 똑같은 요금제를 발표했다"며 "경쟁사가 하루도 안 된 시기에 비슷한 요금제를 들고 나오는 것 자체가 '요금제 베끼기'를 했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SK텔레콤 측은 "올해 초부터 미래창조과학부와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 관련 논의가 있었다"며 "베끼기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당시 논란이 확산되면서 '신상품 배타적 사용권 심의기준'을 통신사 요금제에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국금융투자협회는 지난 2009년부터 회원사 상품의 독창성(40%), 국민경제 기여도(30%), 고객 편익 제공정도(15%), 상품개발에 투입된 인적·물적 자원 투입 정도(15%) 등을 고려해 최대 6개월간 타사가 동일한 제품을 내놓을 수 없는 배타적 사용권을 주고 있다.
다만 이같은 제도가 통신업계에 자리하려면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 등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매경닷컴 김용영 기자 / 방영덕 기자 / 배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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