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여기 또 한명의 조방꾼이 있다. 앞서 소개한 최가가 신의와 침묵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면 그는 또 다른 측면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역시 최가처럼 기생들의 기둥서방인 조방꾼이다. 단순한 조방꾼이 아니라 그들의 우두머리라고 불렸던 것으로 봐서는 상당한 수완가였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의 단골손님에게 은밀하게 얘기했다.
제가 이번에 정말 아름다운 기생을 데려왔습니다. 가히 경국지색이라고 할 만한데 열 냥만 내시면 그 기생과 달콤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이중배의 얘기에 귀가 솔깃한 손님은 냉큼 열 냥을 내놨다. 그리고 약속한 날, 잔뜩 기대감을 품은 채 기방에 찾아갔다. 과연 이중배의 말대로 은은한 등잔불이 켜진 방 안에는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고도 아홉 명의손님들이 와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기방은 돈만 있다고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복잡하고 우스꽝스러운 기방만의 예법을 따라야만 했는데 예를 들면 양반집 자제라고 해도 기방에 드나들 때는 그 집 청지기라고 둘러대야만 했다. 체면과 예법이 쾌락의 현장인 기방까지 파고든 셈이다. 따라서 선금 열 냥을 낸 손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다른 방해꾼들이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얄밉게도 다른 손님들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조방꾼 이중배도 계속 드나들면서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걸 본 손님은 그가 다른 사람을 쫓아내고 싶어 하지만 기방의 예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그렇게 기묘한 대치상황이 밤새 이어지고 새벽이 밝아왔다. 그러자 이중배는 싸구려 술과 나물을 대접하고는 날이 밝았으니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다. 체면 때문에 거금 열 냥을 날린 손님은 빈손으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사자들은 꿈에도 몰랐지만 사실 거기 모인 열 명의 손님들은 모두 이중배가 열 냥씩 돈을 받은 손님들이었다. 조방꾼으로 오랫동안 일했던 그는 기방의 풍습을 이용해서 무려 백 냥이나 되는 돈을 갈취한 것이다. 이중배의 사기극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중배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경력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사기극을 꾸몄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백 냥이라는 돈도 조방군들의 우두머리라는 얘기를 듣는 그에게는 거금은 아니었으리라. 어쨌든 그의 계획은 멋지게 성공했고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어떻게 보면 범죄나 다름없는 짓인데 사람들은 왜 비난 대신 칭찬을 하면서 이야기를 퍼트렸을까? 기방에 드나드는 손님들을 오입쟁이라고 불렸다. 주로 독점유통으로 큰돈을 번 경강상인들이나 역관 같은 중인들, 그리고 귀족화된 양반들인 경화세족(京華世族)의 자제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백성들은 점점 가혹해지는 수탈과 거듭된 흉년에 큰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많은 돈을 번 상인들과 권력을 이용해서 부를 축재한 경화세족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따라서 18세기와 19세기의 한양은 화려한 유흥문화가 꽃을 피우는 동시에 길거리에 굶주리는 사람이 구걸을 하는 극과 극의 도시였다. 하루 한 끼를 먹기도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미녀와의 하룻밤을 위해 열 냥이라는 거금을 아낌없이 쓰는 부자들이 더 없이 미웠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중배의 사기행각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대신 전설로 남게 됐다.
정명섭(소설가)
제가 이번에 정말 아름다운 기생을 데려왔습니다. 가히 경국지색이라고 할 만한데 열 냥만 내시면 그 기생과 달콤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이중배의 얘기에 귀가 솔깃한 손님은 냉큼 열 냥을 내놨다. 그리고 약속한 날, 잔뜩 기대감을 품은 채 기방에 찾아갔다. 과연 이중배의 말대로 은은한 등잔불이 켜진 방 안에는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고도 아홉 명의손님들이 와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기방은 돈만 있다고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복잡하고 우스꽝스러운 기방만의 예법을 따라야만 했는데 예를 들면 양반집 자제라고 해도 기방에 드나들 때는 그 집 청지기라고 둘러대야만 했다. 체면과 예법이 쾌락의 현장인 기방까지 파고든 셈이다. 따라서 선금 열 냥을 낸 손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다른 방해꾼들이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얄밉게도 다른 손님들은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조방꾼 이중배도 계속 드나들면서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걸 본 손님은 그가 다른 사람을 쫓아내고 싶어 하지만 기방의 예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그렇게 기묘한 대치상황이 밤새 이어지고 새벽이 밝아왔다. 그러자 이중배는 싸구려 술과 나물을 대접하고는 날이 밝았으니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다. 체면 때문에 거금 열 냥을 날린 손님은 빈손으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사자들은 꿈에도 몰랐지만 사실 거기 모인 열 명의 손님들은 모두 이중배가 열 냥씩 돈을 받은 손님들이었다. 조방꾼으로 오랫동안 일했던 그는 기방의 풍습을 이용해서 무려 백 냥이나 되는 돈을 갈취한 것이다. 이중배의 사기극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중배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경력에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사기극을 꾸몄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백 냥이라는 돈도 조방군들의 우두머리라는 얘기를 듣는 그에게는 거금은 아니었으리라. 어쨌든 그의 계획은 멋지게 성공했고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어떻게 보면 범죄나 다름없는 짓인데 사람들은 왜 비난 대신 칭찬을 하면서 이야기를 퍼트렸을까? 기방에 드나드는 손님들을 오입쟁이라고 불렸다. 주로 독점유통으로 큰돈을 번 경강상인들이나 역관 같은 중인들, 그리고 귀족화된 양반들인 경화세족(京華世族)의 자제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백성들은 점점 가혹해지는 수탈과 거듭된 흉년에 큰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많은 돈을 번 상인들과 권력을 이용해서 부를 축재한 경화세족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따라서 18세기와 19세기의 한양은 화려한 유흥문화가 꽃을 피우는 동시에 길거리에 굶주리는 사람이 구걸을 하는 극과 극의 도시였다. 하루 한 끼를 먹기도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미녀와의 하룻밤을 위해 열 냥이라는 거금을 아낌없이 쓰는 부자들이 더 없이 미웠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중배의 사기행각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대신 전설로 남게 됐다.
정명섭(소설가)